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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바텐더 Mar 06. 2016

바 테이블 위의 이야기, #1

물고기

저녁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밤이었다. 이럴 때는 으레 손님이 거의 들지 않는다. 술을 마시러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우산 없음과 가게의 외진 자리를 동시에 고려하면,  이불속이 더 매혹적으로 느껴지게 되기 때문이다. 비는 눈으로 변할 듯 말 듯 뿌려대었다. 퇴근을 어찌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와중 가게의 문이 열렸다. 소주와 순대국밥의 냄새가 났다. 두 명 다 초면이었다. 칵테일은  아무것도 잘 모르니 추천을 부탁한다고 했다. 단, 독주로. 소다나 주스처럼 약한 건 싫다고.


'밥을 먹고 근처에 있는 바를 적당히 네이버 지도로 찾아온 일행이,  첫 잔을 독주로 마셔야 한다' 면, 역시 과식을 우려해야 한다. 소화를 도울 만한 것들이 필요하다. 또,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투박한 것이어야 한다. 아마로나 아티초크 리큐르를 넣은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다 베이스는 어떤 게 좋은지 물었다. 젊은 손님은 테킬라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이 든 손님은 위스키가 좋다고 했다. A Long Day(1)와 Sin Syn(2)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A Long Day  : 아녜호 테킬라 1온스, 치나 1온스, 단 베르무트 약간, 오렌지 비터와 자몽 비터 각 1 대시씩. 전부 록 글라스에 넣고 적당히 젓다가, 레몬 껍질을 비틀어 향을 더하고 껍질을 잔에 넣은 다음 내놓는다.
Sin Cyn : 스페이사이드 스카치(특히 맥켈란) 1 온스, 치나 1온스, 단 베르무트(특히 카르파노 펀테메스), 오렌지 껍질 필링.

ALD는 별 고민 없이 만들 수 있다. 그러나 Sin Cyn이 문제. 맥켈란은 여러 가지 라인업이 있지만, 오래 슬쩍슬쩍 저어 주어야 할 성격의 칵테일 같아 맥켈란 12 대신 캐스크 스트렝스를 넣었다. 치나를 넣고, 베르무트를 선택할 때 조금 고민했다. 카르파노 펀테메스는 키나 특유의 씁쓸한 맛과 나무 향이 강한 베르무트다. 쓰고 묵직하고 드라이한 편. 셰리 통에 숙성하는 맥켈란과 잘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가게에는 없다. 가게에는 몇 종류의 베르무트가 있는데,  그중 쓴 베르무트와 스위트하고 묵직한 베르무트를 1:2로 혼합해서 카르파노의 대체품으로 쓰기로 했다. 천천히 저으며 키나 릴레와 세이크리드 앰버를 조금씩 흘려 넣었다. 숙성목을 따로 넣어 두었던 위스키를 조금 더했다.


잔이 나오고 나서도 손을 늦게 뻗을 정도로 둘은 이야기에 몰두해 있었다. 손님 B는 손님 A의 마음을 바라며 애달파하고 있었다. A는 B를 좋아는 하지만,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며 B를 밀어내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바텐더가 둘의 이야기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는 법이다.

나는 안 돼? 알잖아 나는 C를 좋아해, C는 너를 안 좋아하잖아, 그건 모르는 거야, 야 그래도, 안 돼 난 오늘 너한테 단념하라고 말하러 나왔어, 너도 안 되잖아 나보고 어떻게 그렇게 이야길 해, 그래도 나는 C를 좋아해...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B는 계속 울먹이고 있었다. 마침 둘 뿐이었고, 나는 바 테이블이 잘 보이지 않는 쪽으로 가서 일부러 부스럭부스럭 바쁜 척을 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라서 곧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기 마련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A는 대단히 굳건했다. B는 술을 비웠다. A는 두 모금 정도를 마셨다. B는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바텐더님 저 여기 다 마셨어요. 같은 걸로요. 이거 맛이 괜찮네요. 괜찮은 것치고는 표정이 울 것 같았다. 묵묵히 감사를 표하고 한 잔을 더 만들고 내어 주고 나니 전화가 왔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비웠다.


통화를 끝내고 오니 잔이 깨져 있었다. 화를 참지 못해서 던지거나 깬 것은 아니고, 껴안는 서슬에 밀려나 바닥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둘은 죄송하다고 말하고, 잔 값까지 치르고 일어섰다. 둘 사이에 그 동안 어떤 말이 오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든 두 사람에게 술이 덜 필요한 날이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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