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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시딘 Feb 26. 2020

오뚜기 크림스프

현관을 열자 집주인의 성격처럼 깔끔한 거실이 희윤을 맞았다. 지방 이전한 공기업에 면접을 보러온 희윤은 학교 선배인 경선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주말인 내일 서울에 갈 예정이었다. 전라남도는 서울에서 꽤나 먼 곳이었다. 긴장이 풀린 그녀는 소파에 깊숙이 앉아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댔다. 눈 앞에 아른거리던 빛이 조금씩 사라지며 희윤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침대에 눕지, 피곤했나보네.”

경선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았다. 파자마를 건네며 경선은 걱정스런 얼굴로 희윤을 바라보았다.

“고생했는데, 맛있는 거 해줄게. 당장 생각나는 거 말해봐.”


“스프, 크림스프가 먹고 싶어요.”

아차, 머리를 거치지 않은 생각이 바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희윤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신세지는 것도 미안한데 먹고 싶은 걸 그렇게 단박에 말해버리다니. 무안해하는 희윤을 보며 경선은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나 쿠킹클래스 다닌거 알고 있었던 거야?”


거들겠다고 일어서는 희윤을 자리에 앉힌 경선은 휘파람까지 불며 냉장고를 뒤졌다. 가스불이 켜지고 바로 고소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식빵 굽는 냄새가 퍼지자 희윤은 엄청난 공복감을 느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잠깐 동안 식탁에는 식빵 크루통까지 갖춘 크림수프와 샌드위치에 블랙올리브를 잔뜩 얹은 샐러드까지 차려져 있었다.

“자, 얼른 맛을 보라고!”

밀가루로 화이트 루를 만들어 뭉근히 끓인 진짜 크림수프였다. 사실 희윤이 머릿속에 떠올린 수프는 이게 아니었다. 샐러드에 발사믹 소스를 섞던 경선은 희윤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 이거 안 좋아하는 구나?”

“아니에요. 전 그냥 오뚜기 크림스프 제가 사다 끓일까 생각했거든요. 그럼 선배도 편하고.”

정색한 표정으로 경선은 고개를 저었다.

“야, 오뚜기 스프 얘기 꺼내지도 마라. 그거 생각하면 아주 그냥...”

한참 고개를 저은 경선은 거칠게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는 서른 여섯의 경선에게 찾아온, 마지막 사랑일지도 몰랐다. 아니 사랑이라기보다 거의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멀쩡한 남자일지도 몰랐다.

서울이 아닌 곳으로 이직을 생각하며 많은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나 서울이라서 딱히 경선이 얻은 메리트는 없었다. 이어진 야근, 주말엔 충전을 위해 집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출근도 직접 운전하는 일이 많았다. 서울에 남아 있었던 건... 그래도 연애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지만 어느 순간 그마저도 흥미를 잃었다. 높은 연봉과 업무, 그리고 박사과정 지원을 약속받았다. 옮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연구소와 공장이 함께 있는 회사는 지역 중심가와는 떨어진 공업지구에 있었다. 회사 사람 외에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동료와 대학원 동기들은 모두 기혼이었다. 사실 소속 집단안에서 연애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고 있긴 했다. 서울에서 소개를 받고 주말에 몇 번인가 만남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달려 장거리 연애를 하기엔 체력이 부족했다. 일도 연애도 국력도 모두 체력이라는 말을 그녀는 실감했다. 결혼이 필수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남은 열정이 사라지기 전에 연애는 좀 해보고 싶었다. 그때, 지역의 공기업에 다니는 그를 소개받았다. 직업이나 외모 모두 평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의 직장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다른 것 보다 경선은 같은 지역에서 일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연애에도 에너지를 아낄 나이가 된 것이다.


“우린 에너지가 맞아요. 경선씨와 나의 에너지가 연대하면 더 큰 전기를 낼 수 있을 거에요.”

누가 전기 회사 엔지니어가 아니랄까봐. 그는 자신의 모든 대화에 전기를 만들고 공급하는 그의 회사를 어떻게든 우겨 넣곤 했다. 그녀는 그의 유치한 면이 순수하게 느껴졌다.

뚱뚱하다고 할 수 있는 동글한 몸을 지닌 그는 먹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무엇이든 빨리, 그리고 많이 먹었다. 경선 또한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기 때문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치킨이나 피자, 아구찜처럼 함께 먹어야 하는 음식을 앞에 두고 그는 한꺼번에 많이, 또 빠르게 먹어댔다. 덕택에 그와 식사를 하면 늘 출출했지만 다이어트에 적인 외식을 그가 무찔러주니 한편으론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삼겹살, 아구찜, 곱창, 해물탕, 아니면 그만이 아는 수육이나 뒷고기 집 등 구석구석 허름한 맛집을 찾아다니던 그가 어느날 특별한 식당을 예약했다며 문자를 보냈다. 경선은 쓴웃음을 지었는데, 그곳은 바로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경양식집 ‘겨울나그네’였던 것이다. 호수공원 쪽에 멋진 레스토랑이 많은데 ‘겨울나그네’라니. 식당보다 그녀가 기대한 건 그날 꼭 해야할 말이 있다는 문장이었다. 혹시, 프로포즈? 외근으로 텅빈 사무실에 그녀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았다. 유튜브에서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나그네를 재생하고 이어폰을 꽃았다. 쓸쓸한 멜로디가 귓가에 울렸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노래였다. 초겨울, 겨울나그네에서 프로포즈라니. 의자에 몸을 묻은 그녀는 그의 여전히 유치하고 귀여운 발상에 웃음이 났다.


“김대리, 그녀석 아직 만나고 있어?”

소개를 주선한 정이사였다. 이어폰을 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궁금할테지. 나름 양복 두벌이 걸렸는데.

“네, 덕분에요.”

경선은 약간의 감사가 섞인 공손하며, 또 거리를 두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단지 ‘생각’이었을 뿐이다. ‘그’, 그리고 ‘프로포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정이사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야 현명한 사람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이어폰속에서 흘러나오는 겨울나그네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여긴 모듬 2인 세트가 제대로에요. 경선씨도 좋아할 걸요.”

체리색의 올드한 인테리어, 붉은 타탄체크 테이블보, 그리고 끊임없이 같은 각도로 흔들리는 촛불조명까지. 어두운 실내는 두 사람의 얼굴에 흔들리는 그늘을 드리웠다. 낡은 그랜드 피아노, 그리고 천정가까이 걸린 커다란 사슴머리 헌팅트로피는 어두운 실내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촛대모양 조명 정말 빈티지네요. 흔들리는 불빛을 계속 보고 있으면 최면에 걸릴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그는 크게 소리 내 웃다가 정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제가 앞에 있는데 촛불을 계속 보실 건가요?”


음식은 빠르게 나왔다. 토마토와 치커리가 든 샐러드와 크림스프가 놓였다. 커다란 스프접시를 본 그는 아이처럼 환호하며 정신없이 후추를 뿌리기 시작했다.

“자, 얼른 드셔보세요. 얼른, 얼른! 이집 음식 중 제일 좋아하는 것이랍니다.”

그의 권유에 경선은 커다란 수저를 들어 수프를 떴다. 오래되서 딱딱해진 식빵으로 만든 크루통에서는 냉장고 냄새가 났다. 그 불쾌한 냄새를 씻어내기 위해 그녀는 스프에 크루통을 완전히 적셔 입에 넣었다. 멀겋게 끓인 오뚜기 크림스프였다. 접시를 핥아낼 듯 빠르게 스프를 먹어치우는 그를 보며 그녀도 정신없이 스프접시를 비웠다.

“역시, 경선씨도 스프 좋아했군요. 이집 분위기 있죠? 요즘은 빈티지한 레스토랑이 대세잖아요.”


빈티지한게 아니라 그냥 낡고 오래된 식당인 것을. 그녀는 약간 김이 샜지만 아이처럼 신나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냥 웃어버렸다. 사람이 소탈한 건가. 그가 기다리던 메인 요리가 나왔다. 그녀는 실소를 터뜨렸다. 왕돈가스, 생선가스, 반숙후라이를 얹은 함박스텍과 양배추 샐러드가 담긴 아주 커다란 접시가 그녀의 앞에 놓였다. 둘이 먹기에 충분해 보이는 그 접시하나가 1인분이었다.


“어때요, 대단하죠? 가성비란 이런 걸 말하는 겁니다!”

나이프를 들어 냉정하게 노른자를 터트린 그는 노른자가 흐른 커다란 함박스텍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녀도 눅눅하게 튀겨진 생선가스를 잘라 타르타르소스를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그때부터 였다. 아랫배가 싸르륵 아파오기 시작했다. 구내식당의 식사 외에 별다르게 먹은 것이 기억나지 않았다. 생선가스를 입에 넣은 순간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폭탄을 맞은 기분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요..”

덧붙일 틈도 없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프고 힘들고, 정신이 없었다. 그 뒤로 그녀는 의자에 붙어 앉을 틈 없이 화장실을 오가야 했다. 세 번째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 그는 자신의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는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일 없다는 듯 묵묵히 식사해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그게, 제가...”

“괜찮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가 망설이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특별한 곳에서 그는 분명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예상한 그 이야기라면.. 순간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 싫어졌다.

“네, 말씀하세요. 오늘 할 얘기가 있으셨던거 아니에요?”

그는 잠깐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수줍어하는 그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드는 순간 역시나 그녀의 장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뱃속이 뒤틀린 듯한 복통이 몰려왔다.


“자, 잠시만요. 제가 다시 좀 다녀와야....”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 그녀의 손목을 그가 낚아채듯 잡았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좀 이따요. 지금은..”

그는 결심한 듯 빠르게 그녀에게 말했다.


“안드신 음식 제가 먹어도 될까요?”


*


유당불내증이었다. 유전적으로 그녀는 유제품을 먹지 못했다. 극미량의 유당에도 장은 격렬히 반응했다. 건조 우유가 들어간 인스턴트 크림스프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날, 그녀는 그의 손목을 뿌리치고 짐을 들고 화장실을 들러 바로 집으로 와 버렸다.

“그럼, 언니.. 이건..”

“두유로 끓인거야. 그나저나 더 웃긴건 뭔줄 알아?”


그만 만나는 게 좋겠다는 그녀의 전화에 그는 다행이라며 솔직해지고 싶다고, 용기있는 남자이고 싶다고 뜸을 들였다. 결혼을 생각하는 회사 후배가 있다고,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라며 그 덜떨어진 목소리로 한 술 더 떴다.

“경선씨가 나를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서, 이 말이 하기 힘들었어요. 난 친구로 지내도 좋을 것 같은데, 경선씨는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날 마지막으로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거 사주고 이야기하려....”


그녀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 지긋지긋한 남쪽동네를 떠나고 싶었다. 목구멍이 포토청인 현실이 서글플 따름이었다. 슬금슬금 그녀를 피하는 정이사를 보는 것도 싫었다. 들떠있던 감정들을 한없이 부인하고 싶었다. 혼자 술을 마시던 어느밤, 그녀는 문득 그날의 슬픈 예감처럼 들리던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가 생각났다.


-나는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나네


“관계에 서툰 이방인, 그게 나였어. 빨리 여길 뜨고 싶어서 한동안 좀 힘들었는데, 이젠 괜찮아. 그런 감정을 느낄 가치도 없는 일이었어. ”

경선은 빵으로 바닥에 남은 크림수프를 깨끗이 닦아 입에 넣으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유당불내증, 그거 진짜 불편했는데 가끔은 내 본성이 나를 구하는 일도 있더라고."

희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선을 바라보았다.


-친구여 이리와 안식을 취하지 않겠나


“겨울나그네 2부는 또 이렇게 시작하죠. 잊어버리세요. 일단 내일 저랑 맛있는 거 먹으러가요.”

경선은 씁쓸히 웃으며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그나저나 면접은 어떻게 됐어? 너 꼭 붙어야 돼! 그 자식 거기 다니는 거 알지? 내 복수는 남이 해준다고, 꼭 붙어서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부탁해!”

“언니, 크리스틴 알죠? 요즘 핫한 역술가요. 그 사람이 저 올해 취업운 대박이래요. 걱정마세요. 제가 다 해결해 드릴께.”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희윤은 캔맥주를 쥐고 터뜨리는 시늉을 했다. 둘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어두운 창밖으로 차오를 일만 남은 가느다란 초승달과 촘촘히 박힌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도시의 조명이 없는 이곳에선, 비처럼 쏟아질 듯한 별들이 하늘을 채웠다. 밤이 깊어 별빛이 더욱 선명해 질 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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