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차
모년 모일에
주부 이씨는 갓 배송받은 유정란 스무 알에 고(告)한다.
열흘간 소비할 담갈색 달걀 스무 알이 무사히 배송됐다. 외식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2인 가족인 우리는 열흘에 이 정도의 달걀을 먹는다. 부족하거나 약간 남지만, 한 달 평균 약 50알 정도는 먹는 듯하다. 1년이면 240알! 놀라운 숫자다. 240개의 ‘알’을 먹는다는 건 왠지 SF적으로 하나의 종족을 말살하는 공격적인 종족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참고로 닭은 월1.5마리로 1년에 18마리를 먹는 셈이다. 모체를 많이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달걀 섭취에 대한 민망함에 약간은 안심이 된다. 닭과 달걀은 뫼비우스의 띠를 넘어선 하나같다는 느낌적 느낌으로 말이다.
부지런히 집밥을 해 먹진 않지만 한 두어 가지 단품 요리를 식사대용이나 안주거리로 먹을 때가 많다. 여기에 계란은 최고의 식재료라고 할 수 있다. 삶은 달걀은 식사 대용으로, 밥 반찬으로 다양하게 먹을 수 있다. 다섯 개 정도는 풀어야 부피가 나오는 달걀말이는 반찬과 술안주로 언제나 환영받는다. 자투리 채소는 물론 눅눅해진 김이나 햄, 치즈, 쌀밥까지 다양한 재료를 넣으면 색다른 요리로 밥상을 빛낸다. 토마토 스튜를 활용한 샥슈카에 띄운 달걀이나 장조림류의 반찬, 스크램블에그, 오믈렛 등 꼬리를 물고 수없이 떠오른다.
수많은 달걀 요리 중에 내게 최고는 바로 ‘달걀 후라이’였다. 240개의 달걀 중 내 몫 대부분이 후라이팬에 몸을 달구며 달걀 후라이로 나와 대면했다. ‘fried egg’의 ‘fried’는 ‘프라이’가 아닌 ‘후라이’여야 그 맛이 산다. 그 자체로 쌀밥과 같은, 다양한 재료와 콜라보가 가능한 달걀 후라이는 이제 무엇을 시도해야 하는 백지처럼 식탁위에서 나와 눈을 맞춘다. 어떻게든 맛있게 먹어보라고, 서니사이드 업의 촉촉한 노른자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에게 무언가 더하거나 뺄 것이다. 소금과 간장, 들기름 같은 심플한 간일수도 있고 빵이나 밥, 혹은 다른 요리에 너는 부속될지도 모른다. 달걀 후라이와 어울릴 수 있는 것은 수없이 많지만.
달걀 스무 알, 축사에서 자유롭게 자란 난각번호 1번의 동물복지 유정란. 너의 미래는 한끼 식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정해진 너의 미래를, 너를 낳은 닭도 몰랐을 것이다. 스무 개의 달걀은 무작위로 선택되어 후라이, 달걀말이, 스크램블이 되겠지. 고래뱃속에 든 요나처럼 다이소 꼬꼬 통속에 앉아 전자렌지 마이크로웨이브로 반숙이 되는 운명을 맞을 수도 있다. 양자역학의 주사위 놀이는 나의 달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도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끈 달걀의 운명과 다르지 않았다. 기쁨도 슬픔도 없이 이끌려간 보이지 않는 손. 그 안에서 어떤 요리로 거듭날 것인지도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간 것 같다.
냉장 배송으로 물방울이 맺힌 달걀을 바라보며 ‘애도’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당신을 요리하고 먹는 과정은 나에게 ‘인식’의 과정이 될 것이다. 사랑 손님에게 귀한 달걀을 대접하던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엄마와 같은 애뜻한 마음으로 달걀을 요리하고 먹는 일상을 기록해 보려 한다. 달걀에 어린 물기를 닦아 케이스에 잘 담는다.
달걀 스무 알, 이들의 미래를 알고 있는, 소멸의 주체인 나는 애도와 감사를 표한 후
내일의 요리를 생각하며 냉장고에 넣는다.
미래에 대한 기대도 슬픔도 둥글게 그려내는 달걀처럼
나의 앞날도 간결하고 단정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