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뮤지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늦은 여름 시작된 통증에 뒤늦게 찾아간 병원. 한 달이면 나아지겠지, 봄이면 나아지겠지... 얇은 옷이 두꺼운 겨울 옷으로 바뀌고 다시 가벼운 외투로, 다시 여름 반팔을 꺼내 입을 때까지도 여전히 병원을 오가고 있다. 치료 이후 건강한 몸과 아픈 몸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나누는 게 일상이 되었다. 치료가 생각보다 길어지는데도 나아지지 않아 초조해졌다. 차도가 없는 것이 관리를 잘못하고 있는 내 탓 같았다. 더딘 회복, 다시는 건강한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두려움과 관리에 소홀히 한 죄책감으로 인해 아픈 몸에 우울감까지 더해졌다.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아픈 몸 그 가운데에서도 노화와 노화로 기억과 인지력이 서서히 사라지는 ‘인지저하증’을 둘러싼 다양한 감정과 기억에 대해 다룬다. 이 전시는 점점 사라져 가는 기억으로 인한 상실감과 고독, 치유할 수 없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조각조각 부서지는 소중한 삶의 순간에 대한 안타까움, 절망을 이야기하면서도 지속되고 있는 삶을 담았다.
고독한 투병의 시간뿐 아니라 그 고통을 지켜봐야만 했던 누군가의 두려움을 표현한 루이스 부르주아의 <밀실>은 오랜 투병으로 인한 고립감과 쓸쓸함이 전해져 서늘하게 가슴을 찔렀다.
까맣게 타버린 듯한 집, 책상 하나가 덩그란히 놓여 있는 일상의 한 공간. 시오타 치하루의 <끝없는 선>이라는 작품이었다. 마치 모든 기억을 삼켜버린 몸을 상징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기억을 구성하고 있던 언어의 파편이 쏟아져 내리는 듯 (혹은 뿔뿔이 흩어진) 길게 늘어진 선들에 매달려 있다. 이 언어의 파편들은 어디와 이어지고 있는 걸까?
전시는 그들이 처한 아픔을 슬픔과 불운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혈관성 치매를 진단받은 어머니를 사진으로 기록한 쉐릴 세인트 온지는 어머니의 삶 속에서 가볍고도 명랑한 순간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그들의 아픔을 슬픔과 불운으로만 담아냈다면 우리는 온지가 포착한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로 살았으니까, 나로 죽을래”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중한 기억을 잃고도 나는 나일 수 있을까? 얼마 전 종영한 <눈물의 여왕>에서 김지원은 기억상실 부작용이 있는 수술을 거부한다. 죽음과 기억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 그래도 살아야지, 하면서도 그 마음이 이해됐다. 나라면 수술을 결심할 수 있을까? 동시에 내 가족이라면 어땠을까? 두 질문의 답은 같지 않았다. 드라마의 마지막까지 김지원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회복되지 않았지만 삶은 지속된다. 건강한 몸과 아픈 몸, 관리한 몸과 관리에 소홀한 몸, 치유할 수 있는 몸과 치유할 수 없는 몸으로 나눠버린다면, 그 삶을 절망과 슬픔, 우울함만으로만 채워버리고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될지 모른다. 아픈 몸속에서도 삶의 찬란한 순간은 계속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건강한 몸이 아니라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