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이면서 가장 현대적인 연필에 관한 모든 것
광산에서 태어나, 평생 나무 상자에 갇혀 절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것. 연필이다. 이 책은 모든 것을 기록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별반 남기지 못한 연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필은 흔하고 값이 싸 홀대받기 일쑤이고, 이젠 애플 펜슬 같은 전자 연필에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연필이 없었다면, 수많은 예술 작품과 기념비적 건축물도 없었을 것이다. 일상 속 사물에서 공학의 역사와 의미를 끌어내는데 능한 저자는 베일에 가린 연필의 기원과 역사를 파고든다.
중세까지 사람들은 철이나 놋쇠, 뼈 등으로 만든 필기구로 석판과 밀랍 서판에 글을 썼다. 숯이나 납덩어리를 이용하기도 했다. 필기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엔 다이아몬드 반지로 유리를 긁어 시를 쓴 시인도 있다. 인류 역사의 오랜 기간 동안 갖고 다니기 편하고 비싸지 않은 필기구는 그저 꿈일 뿐이었다. 그러다 16세기 흑연 연필 삽화가 있는 책이 등장한다. 흑연 연필이 최소한 400년 전에는 등장했다는 뜻이다. 누가 흑연 연필을 발명했느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흑연은 “막 구운 빵 조각으로도 지울 수 있”어서 큰 인기를 끌었다. 17세기 말에는 나무 자루 안에 흑연심을 넣은 연필이 등장한다.
연필을 만드는 공법은 비밀스레 전수됐다. 그러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발명가 니콜라스 자크 콩테는 오늘날까지도 연필의 기본공법이 되는 혁신적인 연필심 개발에 성공한다. 불순물을 제거한 흑연 분말을 도자기용 점토와 섞어 물로 반죽해 만들어 고온에 굽고, 그 후 나뭇조각에 끼워 아교로 접착시키는 방식이다. 점토와 흑연의 배합 비율에 따라 진하기가 바뀐다. 연필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오늘날 민중의 필기구가 됐다.
책은 연필 산업에 종사했던 이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월든>을 쓴 미국의 작가·철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가문의 업은 연필 제조였다. 소로 자신도 독일 파버 사 와 비슷한 연필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연필의 역사는 공학과 산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했지만 이제 기술의 발전 때문에 그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필기감을 좋아하는 이들, 머릿속의 생각을 글과 그림으로 즉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는 한 연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연필에 관한 이 책도 1997년 한국에 번역 출간 후 절판됐지만, 올해 7월 17일 715명의 북펀딩에 힘입어 재출간됐다.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홍성림 옮김·서해문집·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