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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스진아쌤 Oct 03. 2020

나의 리틀 포레스트, 스위스

창업을 그만두고 돌연 스위스로 이주한 이유

2016년 1월,  영어컨설팅으로 창업을 하고, 뭔가 감을 잡은 것 같았던 3년 차 시절. 집과 공유 오피스의 핫데스크, 카페 등을 사무실로 삼다가, 작은 개인 사무 공간을 마련했다.

당시 나는 새로운 기대감으로 부풀어있었다.

그동안 김밥천국의 메뉴처럼 다양했던 영어 관련 서비스들을 추리고, 꽤 유망할 거라 생각되는 아이템 한 두 가지에 집중하려던 참이었다. 3년 간의 여러 시도는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인 동시에 고객 니즈가 충분한 일을 찾아내는 데 좋은 경험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메일함에 도착한 어떤 채용공고 소식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바꾸었다.



3년 간 창업의 토대를 닦고, 이제 조금 제대로 해볼 수 있겠다 싶겠다 했는데... 사업자 폐업 혹은 다시 직장인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구글 알리미(Google Alerts)가 나에게 이 채용공고를 전해준 것이다.

바로 때보3년 전, 마지막 직장에서 퇴사한 후 설정해둔 알림을 통해 온 것이었다. 나는 당시 '영어' '국제' '에디터' '번역' '채용' 등의 키워드 조합으로 몇 개의 알림을 설정해두었었다. 직장인일 땐 이런 기능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다. 퇴사 후 창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참석한 강의 덕분에 알게 된 것이었다.


* 이 글을 빌어서 당시 스마트워크 강의를 하셨던 홍스랩 홍순성 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여하튼 구글 알리미를 통해 3년간 수많은 채용공고가 내 이메일함에 도착했다. 그때마다 슬쩍 훑어볼 뿐, 진지하게 지원을 고려해본 것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2018년 봄, 제목에 '제네바'라는 도시 이름이 있는 이 공고를 본 순간, 생각할 틈도 없이 그저 지원해야겠다 생각했다.


인생에 그런 순간들이 있다. 어떤 것은 너무나 명확해서 눈과 몸과 마음이 단번에 알아차린다. 직감(gut feeling)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다시 직장인이 되는 것만이 아닌 다른 도시, 그것도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스위스 땅에서의 직장생활이라니. 지금에 와서야 이런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내가 지원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했다.

채용공고를 보자마자 지원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많은 한국 회사가 그렇듯 지원하는 곳에서 채용 서류로 요구하는 공인영어점수가 당시에는 모두 만료가 되고 유효한 것이 없었다. 나는 구직 중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동안 정기적으로 봐 던 토익시험 점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가장 빨리 시험 점수가 발표되는 영어시험을 찾아보니 ibt 토플이었다. 토플을 부랴부랴 보고, 기타 지원 서류는 다 준비해둔 채, 시험 점수가 지원 마감일 전에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마감일과 불과 며칠 차이로 시험 점수가 더 늦게 발표되었다. 고지식한 나는 지원을 그냥 포기했다. 인연이 아니구나 하고 말이다.


그렇게 '스위스'란 곳에 대해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여름날... 구글 알리미가 또 채용공고를 하나 전해주었다.



'제네바'라는 도시 이름을 또 보았다. 두어 달 전 지원하려던 바로 그 회사의 그 포지션이었다. 그리고 제목에 '2차 공고'라고 되어 있었다. 결국 영어점수 발표가 필요한 만큼 빨리 안 나와서 포기했던 곳에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서류를 제출하고, 서류 통과 소식을 받고, 실시간으로 원격 필기시험을 본 후, 화상채팅으로 면접을 봤다.


면접을 본 후 약 한 달 후, 캐리어 3개와 백팩을 짊어지고 스위스 제네바떠났다.







스위스에 온 지 딱 2년이 되었다. 나에게 스위스는 나의 '리틀 포레스트'라고 할 수 있다.


산과 호수 등의 자연경관이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워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내가 나의 모습으로 편안히 살 수 있는 곳. 사실 난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곳을 찾고 있었다.

도심을 벗어나 시골에서 강아지 한 마리 키우면서 번역은 취미로나 하고, 작은 텃밭을 가꾸며 미씽으로 옷을 만드는 런 평온하고 소소한 생활. 수년 전 글로 남긴 단상들을 읽어보면 서른 살 즈음의 나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든 생각이, 살면서 돈을 과연 얼마나 벌어야 하냐는 것이다. 만약 도시에서 비싼 라이프스타일과 소셜 라이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라면, 내 본래의 성향과 추구를 벗어나면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돈을 어느 수준 이상으로 꼭 벌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냥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소비하지 않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나도 한국에서 한 때 소비 중심적인 생활을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쓰지 않도록 할 것이다. 만약 예산 내에서 살 수 없는 것이 꼭 갖고 싶다면, 그 예산을 모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혹은 기다리는 사이에 갖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수도, 잊힐 수도 있다.)

다행인 건 나는 해가 지나면서 오프라인 쇼핑을 매우 매우 귀찮아하게 되었다. 신발을 유난히 좋아하긴 해서 온라인으로 종종 구입하지만, 고가의 명품가방이나 옷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물론 비싼 물건들을 고민 없이 살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이 된다면 관심이 있을 것이다.) 차가 반드시 필요하면 차를 살 수도 있겠다(그리고 그 차는 친환경 전기차이겠고). 하지만 남이 대신 운전해주는 교통수단이 넘치는 도시와 나라에 살기에, 귀찮은 차량 관리며 주차하는 것이며 자동차보험금 납부며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아도 된다. 평생 대도시에서만 살아온 덕분에 그간 차가 필요한 적이 없었다. 게다 걷기 좋아하는 나는 뚜벅이가 얼마나 자유롭고 편한지 모른다.

스위스라는, 물가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곳 중 하나인 이 곳에서, 물가에 비하면 소박한 연봉을 받으며 물질적으로 소소하게 살고 있지만, 마음은 풍요롭고 감사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의 리틀 포레스트는 지금도 앞으로도 그렇게 화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나의 리틀 포레스트는 반짝거리고 비싼 것으로 치장되기보다는 자연에 가까웠으면 한다. 많은 소유로 가득하기보다는 잔잔한 음악,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책들, 향긋한 커피, 따뜻한 음식의 나눔, 가끔씩은 사람들의 웃음소리, 몇몇 예쁜 레트로 소품들, 이런 것들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한참 사회생활을 할 때인 지금은, 제네바라는 세계적인 국제도시에 있는 나의 직장에서 내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제네바도 스위스 제2도시로 큰 도시에 속하지만, 이 곳의 상대적 한적함과 고요함은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나의 리틀 포레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곳이 참 좋다.

8살 때부터 해외와 국내를 몇 년 단위로 번갈아가며 생활해온 나는, 스위스 외에 다른 나라에 사는 옵션도 열어놓고 있다. (스위스처럼 아름다운 곳을 떠나기란 참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언젠가는 이 곳 또한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이 곳 생활에 더 충실하게 되고 이 곳에서의 경험과 만남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스위스는 나에게 거주 국가로 5번째 되는 나라이다. 6번째가 될지 모르는, 혹은 사랑하는 고국이 될지 모르는 미래의 어느 리틀 포레스트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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