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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Nov 08. 2023

겸업작가로 살기

작업이 노동을 대체하는 과도기적 일대기

언젠가 노동은 그 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그것은 스탠리 큐브릭이 재현한 바, 맥의 뼈를 휘두르는 유인원의 도구로의 접속으로 시작하였다. 더 강한 힘을 얻었고, 그 만큼 더 욕망을 채울 수 있었으며 그만큼 수고로움은 줄어들게 되었다.


노동의 역사는 동물의 생존 활동에 그 근원을 두지만, 도구의 발견으로 인해 다른 가지를 뻗칠 수 있었다. 도구는 생존과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 확장된 신체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도구의 발달은 노동력의 감소로 이어졌으나, 노동의 종말을 가져오진 않았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절대적 노동 시간의 증대를 야기하였다.


우리는 생존-노동의 영토화에서 벗어나 욕망-노동의영토로 탈영토화는 과도기적 단계를 지금 막 지나쳤다. 더 노동하는 이유가 생계와 직결되는 정치단계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강해지기 위해, 더 우월해지기 위해 노동한다.


사회 양극화가 고착되고 계급이 공고해지는 사회로 전이할 때 좌절된 욕망과 혁명적 욕망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노동은 욕망과 짝지어져 좌절된 노동, 과도한 노동으로 양분화된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 노동의 소멸이라는 테제가 싹을 틔운다.


노동은 언젠가 소멸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자리를 뺏어가는 인공지능-로봇의 연합으로부터 밀려남이 아니라, 욕망-노동의 영토화의 실패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노동 대신 작업이 자리매김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 의 완성을 의미할 것이다.


한편 노동은 욕망과의 연합을 벗어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활동으로 그 의미가 축소 될 것이다. 그것이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의 뼈다귀에서 우주선으로의 전환이 암시하는 바이다. 이는 확장된 신체로의 도구가 아닌 새로운 종으로서 분화된 도구의 등장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새로운 종, 지금은 인공지능이라 부르는 그것들에게 우리의 노동을 전임하고 생존을 의탁한 채, 진정한 의미의 “인간” 활동에 전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업이다.


이 일대기는 노동에서 작업으로의 탈영토화 과정을 그려낼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기도 하며, 쟁취하는 제스쳐이기도 하다.


아래 영상은 그 과정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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