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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cud Dec 19. 2023

컴퓨터 게임의 예술 형식으로서의 가능성

놀이 미학의 복원

* 작성 2015년 11월 자


Ⅰ. 들어가며


 조사를 시작하기 전, 필자는 응당 게임이 예술의 한 장르일 것 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냐는 원론적인 논쟁은 현재까지도 온-오프라인에서 뜨겁게 진행 중이었고, 게임이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다뤄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사진과 영화의 예술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잠잠해지고, 이들 매체가 소위 고급 문화로 향유 가능한 예술이 된 반면, 게임은 여전히 저급한 오락 문화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초기의 영화의 등장에서 시대의 지각방식의 긍정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읽어냈듯이, 게임의 매체적 특성에 기인한 오늘날의 시대의 지각 방식 역시, 기술적 형상의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인식차원의 코드, 즉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가 말한 미래의 문화 활동 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기존의 예술에 비견했을 때, 여전히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유효할 것이다. 이는 예

술로서의 게임을 배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게임 매체에 내재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할 토래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질 것이다. 한 장르의 예술적 가능성을 탐색해볼 때, 해당 장르가 갖고 있는 형식을 살펴보는 것은 유용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게임의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엿보기 위해, 본문을 다음과 같이 구성하였다. 먼저 Ⅱ장에서는 예술로서의 게임에 대한 상반된 입장들을 간략히 살펴보고, 게임학Game Studies에 접근하는 두 개의 다른 차원, 루돌로지Ludology와 서사학Narratology에 대해 알아본다. Ⅲ장에서는 게임과 예술의 관계에 있는 ‘게임-아트Game Art’ 과 ‘아트-게임Art Game’의 사례를 알아보도록 한다. 해당 비교를 통해 본 발표의 주된 대상인 예술로서의 게임, 즉 ‘아트-게임’의 현 진행태를 살펴보며 게임의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점쳐보도록 한다. 이후 Ⅳ장에서는 게임의 핵심적인 특징인 놀이를 철학적 대상으로 다룬 사상가들의 논의를 살펴보며, 놀이의 미학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본격적으로 논의에 들어가기 앞서, 필자가 주목하려는 ‘예술로서의 게임’은 게임의 초기 형태인 <Pong>이나, <Tennis for Two>가 아니란 점을 명시하는 바이다.


Ⅱ. ‘예술로서의 게임’에 관한 논쟁과 게임학


1. ‘예술로서의 게임’에 관한 논쟁

 미국의 영화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로저 에버트Roger Ebert는 예술로서의 게임과 관련해 가장 뜨거운

논쟁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는데, 2005년 “비디오게임들은 절대로 예술이 될 수 없다Video Games can never be art”라는 제목의 아티클 을 발표함으로 게임을 예술적 매체라고 믿는 이들과 뜨거운 첫 논쟁 벌였다. 에버트는 “예술은 규칙들과 점수, 목적, 결과와는 상관 없이 경험하는 것인데, 게임의 목적은 오로지 ‘이기는것’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누구라도 게임이 위대한 시나 영화 제작자, 소설가들과 비교하여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떠한 게임도 예술 작품과 같은 수준의 것은 없다.” 라고 단언적이고 공격적인 발언으로 게임의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이에 비디오게임 프로듀서이자 디자이너인 켈리 산티아고Kellee Santiago는 TED를 통해 에버트의 의견

을 정면 반박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고, 라스코 동굴벽화와 같은 원시형태의 예술을 제시하면서, 예술의 기원으로 볼 수 있는 고대의 형태들이 예술적 흐름으로 귀결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예술이 감각과 감정을 자극하는 일련의 의도된 과정이라면 ‘게임은 이미 예술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외에도 게임이 예술일 수 있는 가능성을 주장하는 흥미로운 발언들이 온라인 상의 익명의 다수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2. 게임학 : 서사학Narratology과 루돌로지Ludology

 90년대 이후 등장한 ‘게임학’은 컴퓨터 게임을 문화·예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그 이전에도 게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바 있었으나, 주로 게임이 야기하는 사회적 문제(폭력성, 중독성)에 대한 비판적인연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영화 수준의 화면과 짜임새 있는 내러티브가 게임에 구현되고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게임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게임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을 환기하게 된다.


 게임 연구의 초기에는 주로 문학 이론가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서사적 입장에서 분석

한다고 하여 ‘서사론자Narratologist’라고 불린다. 서사론자들은 비디오게임을 ‘영화’와 ‘텔레비전’ 등과 같

은 영상 서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파악하고, 그 본성을 ‘서사’ 혹은 서사발생 을 위한 수용자실천으로서의 ‘스토리텔링’에 있다고 본다. 이후 서사론자들이 게임의 놀이적 측면을 간과하였다고 주장하는 다른 집단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루돌로지스트Ludologist’라 칭한다. 루돌로지스트들은 비디오게임의 본연을 ‘놀이’에 있다고 보며, 따라서 행위자의 유희적 행동과 실천이 그것을 구성하는 의미이며 내용이라 간주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게임의 연구 전개를 이처럼 ‘놀이’와 ‘서사’의 두 차원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초기에 두 입장간에 충돌이 있었지만, 이들을 배타적으로 이해해선 안될 것이다. 게임은 서사 혹은 놀이 한가지 개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표적인 루돌로지스트인 곤살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는 자신의 논문「루돌로지스트들도 이야기를 좋아한다.Ludologists love stories, too:notes from a debate that never took place」를 통해 두 입장을 화해 시키고자 하였다. 게임은 서사이면서 동시에 놀이이다.  


Ⅲ. 예술 형식으로서의 컴퓨터 게임


 ‘게임을 예술로 볼 수 있느냐’와 관련해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지만, 게임학의 등장 이후 게임을 예술적 매

체로 받아들이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영화가 ‘예술 영화’가 아니듯이 ‘예술 게임’에 대한 정의역시 필요하다. 대게 예술로서의 게임, 즉 ‘아트 게임’은 게임의 형식을 차용한 예술인 ‘게임 아

트’와 종종 함께 논의되곤 한다. 필자는 이 두 장르를 구분짓는 논의들을 살펴보고, 본고에서 다루려는 ‘아트 게임’에 대한 보다 분명한 정의를 얻고자 한다.


1. ‘게임 아트Game-Art, Art as form of Game’

볼터와 그루신Jay David Bolter & Richard Grusin이 “매체는 재매개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다른 매체

의 기술, 형식, 그리고 사회적 의미를 전유하여, 실제라는 명목하에 그것들과 경쟁하거나 그것들을 개조하는

그 무엇이다.” 라고 밝혔듯이, 뉴 미디어는 모든 선행 미디어를 재매개한다. 한편 뉴 미디어의 등장 이전에도 기존의 예술에서 게임이 차용된 경우가 있는데, 파울 클레Paul Klee의 <슈퍼 체스Super Chess>(1931),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살아 있는 주형Cast Alive>(1967)이 그 예이다. 이후의 현대 미술에서도 게임적 형식과 요소를 빈번하게 차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아티스트 기욤 레이몬드Guillaume Reymond는 픽셀을 인간으로 대치시켜, 초기 컴퓨터 게임인 ‘퐁Pong’, ‘스페이스 인베이더스Space Invaders’, ‘테트리스Tetris’, ‘팩-맨Pac-man’을 재현시켰다. 매튜바니Mathew Barney는 <크리매스터3Cremaster3>의구겐하임 미술관의 원형 홀을 중심으로 촬영한 장면에서 게임 ‘동키콩Donkey-kong’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레벨 구조와 퍼즐, 몬스터 등, 게임적 요소들을 차용한다. 흥미롭게도 플럭스레리저Fluxlasers라는 필명의 예술가는 이 장면을 다시 차용하여 실제 게임으로 제작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예술에 게임 형식을 적극적으로 담아낸 예술을 ‘게임 아트’라고 부르는데, 예술안에 게임을 담으려 한게 아니라, 게임을 예술로서 표현하려한 시도가 바로 ‘아트 게임’이다.


2. ‘아트 게임Art Game’

‘아트 게임’에 대한 정의는 분분하다. 캐나다의 미술 비평가인 티파니 홈즈Tiffany Holmes는 멜버른 디지

털 아트와 문화 포럼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아트 게임’을 처음으로 정의내린다. 그는 ‘아트 게임’을 “한명

혹은 여럿의 시각 예술가에 의해 제작된 대게는 유머가 있는 상호작용적인 작업이면서, 문화적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사회적,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비판을 가하거나, 소설방식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업”이라고 정의내린다. 나아가 그는 아트게임에 반드시 둘 이상 포함되어야 할 항목으로 1) ‘정신적인 도전속에서 이기거나 성공을 경험하도록 정의된 방식’ 2)’(계층적이거나 계층적이지 않은) 일련의 단계를 통한 과정’ 3)’플레이어를 대변하는 중심적인 캐릭터나 아이콘’을 꼽았다. 이후 미국의 예술 이론가인 레베카 캐논Rebecca Cannon는“전체가 (혹은 상당부분이) 플레이 가능한 게임으로 구성되는... 아트 게임은 항상 상호작용적이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성은 경쟁에 대한 요구에 기반한다... 아트 게임은 우선적으로 게임 형식을 내러티브와 문화적 비판을 구조화하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탐구한다”라고 정의하며, 장르의 경쟁적이고 목표지향적인 특성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또다른 예술 이론가 피츠 츠발라라Pippa Tshbalala는 ‘아트 게임’을 보다 넓은 정의에서 바라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작가가 만든 규칙이나 목적에 바탕을 둔 시스템에 국한되지 않은 게임 개념을 다루는 이론을 배경으로 삼는다. 즉 참여자가 게임의 규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도록 만드는 영역까지 포괄하겠다는 것이다.


 필자는 위의 조건들을 부분 충족시키는 게임들 중 대중에게 ‘아트 게임’으로 인식되고 있는, <디 언피니시

드 스완The Unfinished Swan>(2012)와 <저니Jornqey>를 소개하고자 한다. <디 언피니시드 스완>은 미국의 인디 게임 스튜디어 자이언트 스패로우Giant Sparrow가 개발한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이다. 게임의 스토리라인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좋아했던 ‘끝나지 않은 백조’를 찾기위한 주인공 먼로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하얀 화면에 검정 페인트를 던지면서 길을 발견해야하는 여정을 완수해야하는데 게임의 환상적인 그래픽은 신선한 감각을 제공한다. 플레이어가 능동적으로 스토리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많은 유저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다음으로 <저니>는 인디 게임 제작사 댓게임컴퍼니Thatgamecompany에서 제작된 어드벤쳐 게임이다. <저니>는 세계적인 권위의 GDC(Game Developer Choice) 어워드를 비롯해 100여개가 넘는 게임상을 수상한바 있으며, 사운드트랙은 그래미 시상식의 후보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저니>는 일방향적인 스토리 없이 간단한 조작법으로 튜토리얼이 필요 없는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갖춘 게임이다. 환상적인 그래픽과 스토리에 대한 수 많은 추측을 불러온 게임이기도 하다. 게임 내 모래의 사실적인 표현을 위해 제작진들이 직접 해변가의 모래 위를 뒹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아트 게임’이라 불리는 배경에는 대게 게임 내 차용된 멀티미디어적 요소들, 그래픽,

사운드트랙, 서사 뿐만 아니라 게임 고유의 규칙과 질서, 상호작용성, 모듈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게임 아트’과 ‘아트 게임’을 비교하였을 때 사실 그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예술과 게임이 점점 더 서로를 적극적으로 매개하는 과정에서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게임인지의 구분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게임의 고유한 영역인 놀이적 측면은 재평가 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놀이가 단순히 유치하고 수동적인 소비의 행태인지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놀이 개념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제공해줄 여러 사상가들의 논의를 좇아, 놀이가 미학적으로 접근가능 한 것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Ⅳ. 미학에서의 ‘놀이’ 개념

 

 놀이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지만, 서양 고대 전통 철학사에서는 놀이를 가볍고 유치하며 가변적인것으

로 이해했다. 플라톤Platon은 시인이나 화가의 창작행위를 놀이Paidia라고 명명하고 이데아의 모상을 재 모

방하는 부질없는 것으로 보았다. 놀이는 참과 거짓, 선과 악의 범주로 파악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닌 가상의 세

계와 관계된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오랫동안 철학사를 지배해왔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 놀이 개념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 칸트Immanuel Kant, 쉴러Friedrich von Schiller는 인식판단과 도덕 판단 이외 심미적 판단에 주목한다. 특히 칸트는 놀이와 심미적 판단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이끌어 내었는데,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미에 대한 판단은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를 통해 드러난다고 보았다.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서로 다른 인식능력이 우연히 일치하여 얻게되는 것이 바로 미적 쾌감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놀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에게 있어 놀이는 양면적인 성격을 갖는다. 노동과 교육학적 측면에서 놀이는 통제되어야 하고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즉 칸트에게 있어서 놀이는 여전히, 수단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따라서 칸트의 놀이 개념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에 와서 비판받는다. 니체는 놀이를 칸트와

는 달리 노동보다 우위에 두려 하였다. 이는 근대가 잉태한 괴물인 니힐리즘을 극복하고 탈근대를 이끌 초

석으로서의 놀이를 상정하려한 의도였다. 니체는 근대의 선형적인 사고를 대체할 새로운 사고로 놀이적 사고를 제안하는데, 니체의 놀이의 핵심은 상호 작용, 목적과 인과의 부재, 새로운 법칙과 규칙의 창조에서 찾

을 수 있다. 이러한 놀이에 대한 관심은 니체의 후기 사유까지로 이어지면서, 니체 철학의 정수로 불리는 ‘힘

에의 의지’, ‘영원회귀’에서 보다 선명히 나타난다. 즉, 니체는 근대의 인간상인 노동하는 인간Homo faber

의 대안으로서 유희하는 인간Homo lundens을 제시한 것이다. 니체 이후 놀이는 철학에서의 주된 관심사로 급 부상하게 된다. 그 흐름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어철학의 핵심개념인 ‘언어놀이Sprachspiel’, 말놀이Wortspiel’ 에서 뿐만 아니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전회 ‘이후의 존재’,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에서 놀이의 존재론적 의미 탐구,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에로티즘Erotizm에서도 찾을 수 있다. 또한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가 쇤베르크 무조음악의 ‘불협화음’에 주목한 것 역시 놀이의 진리적 측면에 주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담론을 형성하였던 푸코Michel Paul Foucault(주체의 죽음), 데리다Jacques Derrida(저자의 죽음), 들뢰즈Gilles Deleuze(중심의 해체)의 선언들과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의 후기 사상에서의 주이상스Jouissance의 긍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놀이가 사상의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Ⅴ. 나가며


 19세기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근대가 강요한 노동하는 인간에 의해 희생당

한 유희하는 인간을 복원하려 했다. 그는 문화의 본질과 기원을 놀이에서 발견하고, 놀이를 통해 시대의 부조리를 극복하려 했다. 하위징아는 놀이를, “먼저 질서를 창조하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 하나의 질서가 되는”것, “불완전한 세계와 혼란스러운 일상에서 잠정적이고 제한적인 완벽함을 가져다주는”것이라 정의하였다. 즉 놀이와 노동은 규칙의 유무에 따라 구분되는게 아니라, 규칙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느냐, 외부에 의해 강제된 것이냐의 차이인 것이다.


 하위징아의 통찰은 앞서 살펴본 사상가들의 놀이의 개념과도 일견 유사해보인다. 그렇다면 해당 관점에서

는 컴퓨터 게임을 예술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 우세할 것이다. 컴퓨터 게임은 제작자가 부여한 규칙을 반복적으로 따르는 일종의 노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게임의 예술 영역은 자발적으로 규칙을 생산한 제작자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서사적 측면을 제하였을 때, 게임내 시뮬레이션의 수준은 어디까지나 변수를 늘린 것에불과하다. 플레이어들이 게임내에서 규칙을 창조할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게임의 규칙에 근본적으로 간섭하기 위해선 플레이어들은 해킹툴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전문적인 지식과 프로그래밍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컴퓨터의 태생적 한계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수적재현으로 전환된 디지털 언어를 활용한 시뮬레이션-놀이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 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까지의 ‘예술 게임’은 진정한 ‘놀이’로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오늘날의 ‘예술 게임’을 예술이 될 수 있는 잠재태 정도로 이해해 하기로 한다. 앞서 살펴본 ‘아트-게임’ 사례에서 플레이어들의 역할을 부각하려는 시도는 오늘의 뉴 미디어 아트가 게임 매체를 재매개하며 규칙과 질서를 부여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선택의 자유를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 처럼 보여진다. 이처럼 기존의 매체와 게임간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는 현상은 아마도 시대의 패러다임이 게임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전환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한때 저급한 키치로 폄하되었던 예술 형식들이 오늘날 당당히 예술의 자격을 부여받았듯이, 게임 매체로 인한 지각 방식의 변화는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게임을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참 고 문 헌

단행본

곤살로 프란스카, 김겸섭 역,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 게임』,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4.

발터 벤야민, 반성완 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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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하위징아,이종인 역, 『호모 루덴스』,연암서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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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란, 『디지털 게임이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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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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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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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희, 김규정 『디지털디자인학연구 Vol.10 No.2』, 「디지털 게임 아트의 예술적 특성 연구」, 20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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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낙림, 『동서과학 Vol.16 No.1』, 「니체의 니힐리즘극복과 놀이정신」, 한국동서정신과학회 2013,

pp.12-13

정낙림, 『대동철학회 논문집 Vol.53』, 「인식과 놀이-칸트의 놀이 개념을 중심으로」, 2010. 12, p.202.

해외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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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Rebecca Cannon, ‘Introduction to Artistic Computer Game Modification’, Plaything conference, 2003.

Stalker, Phillipa Jane. ‘Gaming In Art: A Case Study Of Two Examples Of The Artistic Appropriation

Of Computer Games And The Mapping Of Historical Trajectories Of 'Art Games' Versus Mainstream

Computer Games’, University of the Witwatersrand, Johannesburg.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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