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 버킷리스트’. 여행을 떠나오기 전, 꼭 이루고 오겠다며 몇 가지의 목록을 작성해 두었었다. 살사 춤 배우기, 샛노랑색 원피스 입기, 번지점프하기, 남미 클럽 가보기 등 단순한 것들이 주를 이뤘지만 그중 보다 특별한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걸어서 국경 넘기’.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사십일여를 머물렀던 콜롬비아를 떠나는 날이 밝아왔다. 비록 근처의 대도시들을 뒤로한 채 구석진 시골마을 안 사막지대에 들어와서 국경으로 향하는 길이 몇 배로 험난해져 버렸지만.
나의 마지막 콜롬비아 여정, 타타코아 사막
험난함의 수준을 풀어서 얘기하자면 지금 머무르고 있는 타타코아 사막에서 지프차를 타고 근교 마을 네이바로 향한 뒤 (1시간 반) 다시 남쪽을 향해 모코아 마을로 향하는 봉고차를 타고 (7시간) 그 뒤 파스토 마을까지 미니 트럭에 실려 (5시간) 도착하고 난 뒤에도 한 번 더 이피알레스라는 국경 근처 마을 (2시간) 까지 이동해야 한다. 놀랍게도 저렇게 이동한 후에도 여전히 콜롬비아의 땅이다.
하루를 온전히 각종 탈 것 안에서 보낸 후 저녁 늦게 도착할 이피알레스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그 다음날에나 택시를 타고 국경 검문소로 향할 수 있다. 꼬박 하루가 드는 긴 여정이다.
특히 모코아에서 파스토로 향하는 5시간의 여정은 콜롬비아 내에서도 악명 높은 곳으로, 산등성이 절벽을 따라 산 하나를 통째로 넘고 다리조차 제대로 놓여있지 않은 계곡도 지나는 비포장길이다. 또한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강도가 종종 출몰하여 해당 구간은 필히 대낮에 이동해야 한다고 전해진다.
두려웠다. 그렇지만 다른 선택사항은 없었다. 에콰도르를 육로로 넘어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자 나의 버킷리스트 달성을 위한 길이었다.
대망의 날. 사막을 떠나는 작은 지프차에 올랐다. 오후 여섯 시경이었음에도 여전히 후끈한 모래를 밟으며 마음속으로 안녕을 보냈다. 안녕 콜롬비아 안녕. 내 인생에 이곳에 두 번 올 일이 있을까, 이미 정해진 답을 아는 듯 마음속 깊이 시림이 느껴졌다.
이별에 긴 시간 아쉬워할 새 없이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다. 한 장소에서 내리면 주변에 우후죽순 몰려드는 호객꾼들 덕분에 헤맬 일 없이 금방금방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지프차에서 버스로 버스에서 봉고차로 봉고차에서 미니 트럭으로…. 타고 있었다기보단 실려갔다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듯하다.
온전한 좌석이라곤 두 개뿐인 미니 트럭에 여섯 명을 욱여넣어 이동하느라 다 같이 트럭 뒤 짐칸에 실려서 실시간으로 천 길 낭떠러지 위 좁다란 돌길을 굽이굽이 넘어가는 걸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게 되었다.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사람들과 서로의 손을 맞잡고 살아서 도착하길 그토록 기원했다. 다행히 추락사도 강도와의 만남도 없이 파스토 마을에 안전히 도착했다.
휴-. 긴장이 풀리며 자연스레 깊은 한숨이 새 나왔다.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 드디어 3개의 이동 수단을 거친 20시간 동안의 대장정을 끝내고 마지막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오늘의 목적지, 콜롬비아 국경 마을 이피알레스가 코앞이었다. 이피알레스 마을이 코 닿을 곳에 위치해 있단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콜롬비아에서 에콰도르를 육로로 넘는 사람은 모두 이 마을을 지나치게 되는데 이는 내가 지금 정말 에콰도르로 향하는 중이라는 걸 실감하게 만들어 주는 매개체였다.
그러나 사실 새로운 나라로 향한다는 설렘보단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를 콜롬비아와의 헤어짐에 아린 마음이 더 컸다. 5주가 넘는 시간 동안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콜롬비아를 단숨에 떠날 수 없었다. 단 하룻 밤이라도 더 붙잡아 두고자 많은 여행자들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이피알레스 마을에서의 1박을 갑작스레 결정하게 되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미리 숙소 예약을 하지 못해서 터미널 근처를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평소의 나라면 한참을 이곳저곳 떠돌며 가격비교를 했겠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22시간 넘게 장시간 이동 후 지칠 대로 지친지라 그저 외관이 깔끔한 곳으로 직행해 적당히 흥정하곤 방을 잡아버렸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 침대 위로 철퍼덕 엎어졌다. 짐을 바닥에 대강 던져두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침대에서 멍 때리고 누워있다가 꼬르륵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시. 더 늦장 부리다가는 꼼짝없이 저녁도 못 먹고 이 동네의 명물인 라스라하스 성당도 못 볼 테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구시가지를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급하게 밥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당에서 나오고 나니 어느새 해가 반쯤 저물어 버렸고 성당 앞에 도착하니 완연한 밤이 되어버렸다. 잔뜩 어두워져 절벽 위에 위치하여 절경을 자랑한다는 주변 광경은 볼 수 없었지만 사진을 검색해 볼 때면 늘 낮의 모습만 나와서 전혀 몰랐던, 밤에만 펼쳐지는 라이트 쇼를 볼 진귀한 기회를 얻었다.
파랑, 빨강, 하양, 노랑, 분홍….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위의 꼬마전구들처럼 쉴 새 없이 바뀌는 형형색색의 불빛들. 늦은 시간대에 몇 안 되는 사람만이 남은 한적한 성당 앞은 한 나라에서의 여정을 마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여기 있는 이들 중 누군가에겐 이곳이 콜롬비아의 첫 도시 일 테고 누군가에겐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소일 테다.
멍 때리고 빠르게 변하는 불빛만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 눈을 감고 기도문을 중얼이는 사람, 친구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 카메라 셔터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사람. 어떤 이유로 그들은 이 성당을 찾아왔을까. 그리고 그들에게 나는 오늘 밤 어떤 사람처럼 보였을까.
종교인도, 건축에 큰 뜻이 있는 사람도 아닌 나지만 왜인지 오늘은 성당 구석 모서리 디테일 하나까지 눈에 깊게 들어왔으며 자꾸만 어디론가 기도를 보내고 싶어졌다.
눈을 감았다. 긴 시간 감고 있었다. 지난 5주간의 기억을 잡지책 읽듯 아름다운 부분들만 골라 이곳 저곳 들춰가며 회상하고 또 회상했다.
길을 물으면 너도나도 앞장서서 도와주던 현지인들, 엄마처럼 챙겨주던 호스텔 주인, 눈이 마주칠 때면 귀여운 미소를 보내주던 동네 아낙네들, 집에 초대해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하룻밤 재워준 가족, 과일을 나눠준 슈퍼마켓 아저씨, 길에서 만들었던 인연들, 동행들.
결국 마지막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여느 명소가 아닌 사람들이었다. 그들 덕분에 완벽할 수 있었다. ‘완벽했다’는 문장 외에는 대체할 것이 없는, 정말 백 퍼센트 완벽했던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