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유럽에 첫 발을 내딛다.
입국 심사가 깐깐하기로 악명 높은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듣던 대로 입국 심사 줄은 길었고, 심사관은 까탈스러웠다.
바우처를 한데 모아 만든 작은 책자를 손에 꼭 쥐고 순서를 기다리는데, 입국 심사관 한 명이 우리에게 걸어오더니 대뜸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한 뒤 정신을 차리고 '조금'이란 말을 덧붙였다. 잔뜩 긴장한 우리에게 그는 한국인이 영어를 못하는데 도와달라고 한다. 우리 앞 순서의 아가씨가 깐깐한 사람에게 걸렸던 것. 패키지 여행 상품으로 와서 호텔 이름만 알 뿐 위치는 몰랐던 그녀. 여행 스케줄표를 보여줘도 입국 심사관은 그저 호텔이 런던에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사실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해 주진 못했다. 그저 한국어로 된 스케줄 표에 나와 있는 가이드와 호텔 연락처를 찾아주고 이 아가씨네 일행은 빅 그룹이라는 말만 했을 뿐. 나중에 짐 찾는 곳에서 그 아가씨를 다시 마주쳤는데,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있었던 걸 보면 그 후로도 꽤나 고생을 했나 보다.
우리를 담당한 입국 심사관도 방금 전의 그 못지 않았다. "런던에 왜 왔니?", "너희는 어떤 사이니?", "숙소 바우처 가지고 있니?", "다음 행선지는 어디니", "영국에서 뭐 할 거니?"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알파벳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도 잠시, 우리는 곧 정신을 차리고 네 개의 귀와 두 개의 입을 바쁘게 움직이며 질문에 답하고, 손에 쥐고 있던 책자를 넘겨 보여줬다. 굳이 바우처를 모아 제본한 성의가 가상 해서였을까? 심드렁한 표정으로 책자를 휘휘 넘겨보던 그는 이내 여권을 몇 장 뒤적거리더니 입국 도장을 들어 책상이 울리도록 쾅 내려 찍었다. 비로소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깐깐한 입국 심사 탓에 우리는 호텔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호텔이 아닌 숙박시설을 이용할 때 입국심사 팁이라는 것도 많았지만, 대개 편법으로 이뤄지는 것인 데다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몇 푼 아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1 존에서 멀지 않으면서 적당한 가격대의 호텔을 고르고 골라 우리는 이비스 런던 얼스코트(Ibis London Earls court)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얼스코트라는 지명이 붙은 것과 달리 호텔은 웨스트 브롬튼(West Brompton) 역에 더 가까웠다. 공항에서 나와 호텔로 이동할 때는 튜브를 탔다. 오이스터 카드를 사서 탑업하고 승강장으로 내려가니 듣던 대로 오래된 느낌이 가득했다. 얼스코트 역에 도착해서 웨스트브롬튼 역으로 가는 노선으로 환승했다. 마침내 역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컴컴해져 있었고, 역에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만 가득했다.
역에서 나와 시티맵퍼가 가리키는 쪽으로 걸었다. 역에서 10분 정도 걸으니 호텔이 보였다. 생각보다 꽤 큰 느낌. 호텔을 지나쳐 5분 정도 더 걸으면 대형 슈퍼마켓과 카페, 상점이 있는 거리가 나온다. 황량한 역 주변과 달리 활기 넘치다 못해 시끌시끌하다. 뭐가 됐건 첫인상만으로 판단하면 안될 일이다.
런던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피곤했던 탓인지 시차 적응이랄 것도 없이 쿨쿨 잘만 잤다. 꿀잠도 그런 꿀잠이 없었을 테다. 느지막이 일어나 창문을 열고 어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감상하며 따뜻한 차 한잔을 마셨다. 한국에서 세워온 계획은 지난밤 꿈과 함께 모두 날아가버렸다.
그래, 이제 와서 계획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지금 런던에 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