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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터프쿠키 Aug 28. 2016

방구석에서 패셔니스타를 꿈꾸다

끝이 없을 것 같던 폭염이 드디어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매번 날씨가 바뀔 때면 가장 먼저 기대되고 고민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날씨를 따라 바뀔 옷차림! 즐겨 가는 SPA 브랜드와 인터넷 쇼핑몰들에도 어느새 가을바람이 분다. 패션 분야 번역이 많은 나는 이번 시즌의 각종 패션 트렌드를 발 빠르게 접하면서 시도해보고 싶은 스타일도 생각해뒀다. 그렇지만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도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 이유는 미천한 몸매도, 가벼운 통잔 잔고도 아니다(물론 그 둘도 아쉬운 점이 많다). 가장 큰 문제는, 멋진 옷을 사봤자 입고 갈 곳이 없다는 거다.


신발장에는 굽 높은 샌들들이 어디 하나 때 묻은 곳 없이 해사하게 대기하고 있다. 올해 산 것도 있고 몇 년 지난 것도 있지만 하나 같이 말끔한 이유는, 좀처럼 신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구멍이 퐁퐁 뚫린 새하얀 가죽으로 발등을 덮고 테두리는 쨍한 빨간색과 청록색으로 마무리한 샌들, 진회색 스웨이드 갑피에 형광 노랑 스트랩을 대비시켜 무난한 듯 통통 튀는 샌들, 삼베 같은 천에 까만 줄무늬와 파이핑이 세련되게 들어간 무려 뉴욕에서 사 온 신상 샌들, 베이지색 가죽 위에 까만 천으로 정성스럽게 주름을 잡아 두른 샌들 대신 여름 내내 신은 신발은 더 이상의 수식도 불가능한 그냥 편한 두 줄짜리 흰 샌들. 그 신발 참 편하지.


유독 더웠던 올여름 나의 외출은 동네 커피숍 출근과 남자 친구와 데이트, 친한 친구와의 만남이 전부였다. 커피숍이야 우리 동네는 힙스터가 아닌 중고등학생의 성지이기 때문에, 나는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문제집 푸는 학생들과 사이좋게 앉아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하는 게 전부다. 데이트 역시 가까운 동네에 사는 남자 친구를 만나 각자의 일을 할 때가 많아서 커피숍 출근보다 화장을 더 정성껏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나는 어쩌면 매일 아침 예쁘게 차려입고 출근해 "대리님 오늘 구두 너무 예쁘네요 하하호호"하며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는 회사 생활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회사 생활을 드라마로만 배운 부작용이 이런 건가 보다.


가을, 겨울이 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질 거다. 가을이면 멋스러운 트렌치코트나 가죽 재킷을, 겨울이면 우아한 캐시미어 코트를 장만하고 싶지만 날씨가 추워질수록 나는 커피숍마저 가지 않고 집에서만 일하는 은둔 생활에 빠질 테고 이번 철에 대여섯 번이나 입을지 알 수 없는(그리고 단가는 비싼) 옷을 덥석 사기는 힘든 노릇이다. 유행 타는 옷을 사지도 않고 이미 있는 옷들도 몇 번 입지 않아 상태가 좋아서 버티기에도 무리가 없다. 이번 가을 겨울도 아마 그렇게 지나갈 거다. 돈 굳어서 좋네!


같은 상황을 두고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프리랜서가 되면서 제 몸도 자유를 얻었어요. 이제는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높은 구두를 신으면서 제 다리를 혹사시키거나 해마다 새 옷을 살 필요가 없죠. 겉모습에 연연하지 않아요. 저는 온전히 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해요."

나도 대충 그렇기는 하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이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건 프리랜서 생활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지만 과분한 자유는 세속적인 영혼을 배고프게 한다. 어쩌면 본격적인 사회생활은 겪어보지도 않고 자유생활 7년 차를 맞이한 내게는 속세라는 이름의 상상 속 낙원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허례허식을 추구하고 싶다고!


푸념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해결책을 찾아보자.

1. 취직을 한다: 답이 아닐 거다.

2. 사람 만나는 일을 찾는다: 사실 2년 정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있다. 기업 블로그의 글을 쓰면서 그 회사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멋진 호텔에서 행사가 열리면 따라가서 취재도 하고 뷔페도 먹었던, 내가 가장 사교적으로 일했던 시절.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덥석 물고 싶지만 그게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3. 나갈 일을 만든다: 학원에 등록하든, 동아리에 가입하든, 정기적으로 나갈 곳을 만든다. 그리고 그곳의 패셔니스타가 된다.

4. 패션 블로거가 된다: 안된다.

5. 프리랜서 패션을 개발한다: 멋진 옷 입고 근사한 곳 가는 것만 패션인가, 내가 존재하는 곳 어디에서든 그곳에 어울리게 차려입으면 될 일이다. 집 앞 커피숍에서는 포근한 스웨터에 가죽 레깅스, 집에서는 편안하고 마바지에 로브를 걸치는 등 그 장소에 어울리는 패션을 개발하면 된다. 비록 봐주는 사람은 부모님과 강아지뿐일지라도.


이번 FW 시즌의 내 패션은 5번을 메인 테마로 전개하면서 3번을 캡슐 컬렉션처럼 진행하지 않을까 싶다. 3번은 단순히 쇼핑을 하는 게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이므로 큰 도약이 기대되고, 5번은 나의 정체성이 담긴 전략이니 만큼 아이코닉한 라인이 나올 수 있도록 창조정신을 발휘해야겠다. 이렇게 또 쇼핑의 명분이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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