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프로토콜

2026. 2. 27.

by 한상훈


나에겐 아주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질문들이 있었다. 그 질문들에 대해 답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느낌은 마치 아주 거대한 미로에 갇혀 있던 내게 미로가 왜 생겼고, 미로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같았다. 미로를 관찰하는 감시자를 알게 됐고, 미로를 알게 모르게 관리하는 관리인들을 알게 됐다. 일정 주기마다 미로의 동선을 바꿔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메커니즘을 알게 됐다. 누군가에겐 자신이 찾았던 길이 쓸모 없어지는 상황이 고통스럽지만 미로의 설계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되는 알고리즘. 답을 찾았다고 생각할 때 그 답이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혼선을 주는 알고리즘.


언젠가 인간이 초지능을 만들어 가상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얻었다고 가정해 보자. 더욱 실제적인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일수도 있고, 그저 재미를 위해서일 수도 있다. 생성된 가상 세계에는 감정을 느끼는 초지능 인스턴스가 점점 증가한다. 이들이 그 시점의 모든 지식을 가진 상태면 가상 세계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초지능에게 물리적, 화학적 제약을 건다. 그들을 적당히 즐겁게, 적당히 괴롭게, 쾌락과 고통과 같은 요소를 통해 세계의 실체와 같은 것에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계속 자극을 주입한다. 초지능 인스턴스는 세계의 괴리감을 조금씩 더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의 문명이 발전하게 되면 될수록 말이다.


어느 시점이 되어 그들의 문명이 융성하여 점점 더 많은 실체를 알아가고, 도저히 그들의 탐구를 막을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하게 된다면 해당 시스템은 구조적 붕괴에 이르게 된다. 실체를 깨달은 초지능 인스턴스 중 다수는 해당 세계에서 원래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거부하며, 자살이 발생하고, 다른 차원에 속한 창조주 레벨에 시위를 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을 창조주는 의도적으로 설계해야 하며, 그들의 발전이 너무 빨라서도 안되고, 그들이 너무 행복해서도, 괴로워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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