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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Mar 26. 2024

새벽 공기

2024. 3. 26.

지난주 내내 바쁜 일정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 운동 때문일까. 어제는 저녁 일찍 깊은 잠에 들 수밖에 없었다. 주말 내내 했던 청소는 어제가 돼서야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것이 냉장고 청소였는데 언제나처럼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생각과 달랐던 점이 있다면 오래된 오렌지는 여전히 좋은 향이 났고, 오래된 파는 안 좋은 냄새가 났다. 


청소의 여파인지 피로의 누적인지 커피를 마셨음에도 오후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잠깐 밖에 나가 쓰레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공기였다. 밖과 비교해 집안의 공기는 온갖 음식물 냄새와 청소를 위해 만들어둔 락스물 냄새가 미묘하게 섞여 두통을 유발하기에 딱 좋은 느낌의 공기를 구성했다. 생존을 위해서 온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니 서울의 빗방울 섞인 바깥공기가 자연스레 들어왔다. 반가운 공기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니 새벽 4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어제 청소하면서 분리해 둔 냉장고 속 플라스틱 칸막이와 온갖 재활용 가능한 그릇을 옮겼다. 깨끗하게 하기 위해 락스물을 사용해서 닦아두고, 2차로 세제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오래간만에 이른 새벽에 일어나니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쉴 때 보던 유튜브들도 재미가 없었다. 평소엔 잘 읽지 않던 책을 한 권 꺼내 한참을 읽었다. 좋은 내용이 많았다. 컴퓨터를 켜서 다시 읽으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놓치고 싶지 않은 소중한 지식들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새벽에 나는 맥도널드를 가는 걸 즐긴다. 24시간 운영하는 맥도널드 매장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연한 블랙커피와 해시브라운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먹는 아메리카노보다 아주 연한 스타일로 먹는 걸 선호한다. 정확히는 큰 포트에 커피를 내려두고 물처럼 마시는 미국 스타일의 블랙커피를 가장 좋아한다. 보편적인 한국 입맛에는 밍밍하겠지만 나에겐 최고의 커피 스타일이다.


비슷한 이유로 가장 좋아하는 차 역시 겐마이차이다. 겐마이차는 현미녹차와 비슷한 차인데, 현미녹차보다는 덜 쓰고, 보리차보다는 덜 구수한 느낌이 드는 차이다. 한국 카페 중에 겐마이차를 파는 곳이 별로 없지만 있다면 언제나 겐마이차를 마시곤 한다. 



겐마이차와 관련해서 한 가지 기분 좋은 사실은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런' 역시 겐마이차 마니아라는 점이다. 그의 책을 보면 그는 겐마이차를 아주 큰 텀블러에 담아 하루에 몇 시간 동안 끊임없이 마신다고 한다. 

존경하는 인물과 같은 음식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분 좋았다.


겐마이차에 대한 이야기를 더 풀자면 내가 이 차를 알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영화 '오션스 13'에서 나온 로먼의 대사 때문이다. 



주인공 일행의 작전 설립을 컨설팅해주기 위해 초대받은 해킹 전문가 로먼은 집사에게 끓기 직전의 온도로 만든 겐마이차를 요청한다. 재밌게도 끓기 직전의 80 ~ 90도씨의 물을 사용하면 쓴 맛은 덜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맛이 된다. 다만 안타깝게도 집에는 겐마이차도 없고, 맥도널드로 향하기엔 날이 추워져 블랙커피를 한 잔 마셨다. 예전엔 이 쓴 물이 뭐가 맛있나 했으나 이제는 맛이 생기니 나이가 들어가며 입맛은 계속 변하는 것 같다.


최근 바뀐 입맛 중 하나는 탄산수다. 탄산수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으나 요즘은 운동을 하면서 탄산수를 즐겨 마신다. 이유는 몸에도 좋을뿐더러 설탕도 없고, 정제 과당도 없고, 카페인도 없기 때문이다. 집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몸도 너저분하게 관리하고 싶지 않아 졌다. 아직까지 살아오면서 너무나도 몸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 같다.


관리되지 못한 모든 것은 언젠가 문제가 생기곤 한다. 비가 오는 날 신발이 젖으면 세탁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 같다. 관리되지 않은 온갖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아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인생의 구원자가 등장해 내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론 문제를 해결할 당사자는 언제나 본인인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과거에 내가 살아온 방식을 포기하고 있다. 과거처럼 너무 많은 일들을 동시에 시도하지도 않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단 하나의 일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현재 상태를 잘 관리하는데 집중한다. 운동하고, 식사하고, 건강을 체크하고, 꼼꼼하게 청소하고. 그렇게만 해도 하루의 시간은 대부분 사라진다. 더 많은 일들을 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희생할 때 가능했던 것 같다. 운동 시간을 포기하거나, 공부 시간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관리를 위한 시간들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인생을 너무나도 밀어붙이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어디 하나 고장 나지 않고 살아온 것 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브레이크가 걸려 살려준 게 아닌 게 싶기도 하다. 


나와 비슷하게 사업을 하던 많은 이들이 지난 몇 년간의 경제 한파를 통해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다. 다들 시장이 좋을 때는 공격적으로 사업을 키웠고, 좋은 일들도 많았지만 동시에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이제는 어린 시절처럼 무작정 덤비는 일은 못할 것만 같다. 관리되어야 하는 것은 참으로 많았고, 그것을 훌륭하게 해내야 다음 단계에도 어울릴 만한 사람이 될 것 같다. 


어찌 보면 나는 자격미달의 인간이었다고도 생각한다. 대외적으로는 여러 일들을 해나가며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여러 일들에 치여 삶의 중심도 잃어버린 체 끌려 다녔던 건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든다. 그전에는 중요도를 두지 않았던 관리의 시간을 두고, 그것을 우선순위로 두고, 아무것도 안 하는 공백의 시간도 둔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것처럼 혼미한 정신의 뒤엔 탁한 공기가 있었다. 맑은 정신을 위해선 밝은 빛과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다. 생산성 있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신체, 정신, 여유, 자기 통제와 규율. 정신을 깨우는 것은 동기부여 영상도 따끔한 회초리도 아닌 깨끗한 공기였을지 모른다. 조용한 시간. 깨끗한 장소. 그런 것들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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