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여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상훈 Jun 30. 2024

2024. 6. 30.

Burned Letters · Johannes Bornlöf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요. 


부모? 남편? 아내? 아니면 자식들?

아니면 돈을 때 먹고 도망간 사람들?

학창 시절 나를 괴롭혔던 놈들? 나의 약점을 쥔 사람들?


미운 사람들은 있어도 인생의 적수라 여기고 사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적이 없기 때문에 공격에 두려움에 떨며 살지도 않고, 적이 없기 때문에 걱정 없이 눈을 감고 잠에 빠집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미운 사람은 있으나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생은 망가져 갑니다. 나를 괴롭히는 적이 없는데, 내 인생을 망하길 바라는 존재는 없는데, 인생은 시시각각 무너져 갑니다. 나이는 한 살 한 살 늘어가고, 기억력은 떨어지고. 모아둔 돈은 줄어들어가고. 모든 게 불확실해지는 시대에 늙고 약해져 갑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려 내 삶에 공격을 가하는 것 같은 이들에게 분노를 표하곤 합니다. 정치인들을 욕하고, 사회를 욕하고, 시대를 욕하고, 경제를 욕합니다. 무차별로 내뱉는 분노는 날카로운 검과 같지만 실상은 아무 쓸모없는 디지털 데이터로 삭제 명령 하나에 사라질 아우성이 됩니다. 분노를 아무리 외쳐봐도 도저히 바뀌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갑니다.


'적은 없는데 삶은 무너져간다.'


적의 실체를 모르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무너져가는 삶을 지탱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오늘도 하루를 견딥니다. 하루를 견디기 위해 파스를 붙이고, 약을 먹고, 카페인을 주입하고, 아등바등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쌈짓돈을 꺼내 하루를 삽니다.


하루하루가 다람쥐 쳇바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빚을 갚기 위해 오늘도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일터로 향합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길은 결코 오랫동안 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벗어나고 싶지만 도저히 도망칠 용기는 없습니다. 이 감옥 밖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날개를 꺾어버린 새처럼 새장에 오래 갇혀있다 보니 날아갈 용기를 잃어버린 새가 됐습니다. 그 어떤 맹수도 나를 노리지 않음에도 날아갈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나약한 인간으로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보냅니다.


적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인생을 이지경까지 몰고 간 원흉도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수 백, 수 천 가지 선택들 중 위대한 선택과 조잡한 선택을 결정할 권한도 내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놀랄만한 선택을 할 힘이 내 안에 있고,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길 선택을 할 권리도 내 안에 있습니다. 새장을 부수고 나갈 용기도 새장 안에서 썩어갈 것도 나의 선택입니다.


위대한 선택을 쌓아가다 보면 위대한 발자취가 될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택.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모습의 선택.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함도 아니고. 아무도 볼 수 없는 이 어둠 속에서 오롯이 나만이 감시자가 되어 적을 상대해야 합니다. 적은 내 안에 있으니. 


맹수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에게는 그다음 싸움이 시작됩니다. 스스로를 가로막는 자기 자신을 이겨낸 이들을 막을 적수는 많지 않을 겁니다. 이미 자신과의 전쟁에서 이긴 사람은 세상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과 체크메이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