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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멍몽이 Nov 30. 2022

성소수자들에 대한 입장이 엇갈릴 때

하나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5

1.

자신을 '깨어있는 기독교인'으로 소개하는 어느 교수님의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당신께서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학교 내에 커밍아웃한 동성애 모임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당신은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지만 이미 서구사회에서는 동성애가 교정의 대상이 아니라 다양한 성적 지향의 한 부류로 과학적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나는 유학파 교수로서 동성애 성향에 대해서 한국 기독교인들도 인정해야 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는 나름 앞서가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 교수님은 평상시 당신이 아주 멋진 지식인이자 젊고 똑똑한 자유인처럼 자신을 마케팅했기 때문에 동성애 지지 주장은 그 멋짐과 똑똑함과 자유에 걸맞은 필수 요소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반전이 있었습니다.


동성애 지지 발언이 있은 뒤 바로 어느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그럼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 있고 여자도 여자를 좋아할 수 있다면, 남자가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와 남자를 동시에 좋아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다양한 성적 지향성에 대한 이해가 없던 시절, 정확한 규정과 용어는 몰랐어도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에 따라 바이섹슈얼에 대한 가능성을 교수님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교수님의 표정은 바로 경직되고 일그러졌습니다.

"아! 그건 성적 방종입니다! 그런 질문을 한 학생은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해야지 이성애와 동성애 두 가지 외에 아직까지 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성지향성은 없습니다. 동성과 이성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어요! 이러다가 동물을 사랑하면 동물애라고 인정해달라 할 건가요?"


강의실에 교수님 팬이 많았던 수업이었던지라 질문한 학생에게 따가운 경멸의 눈초리가 쏠렸습니다. 그리고 학기가 끝나자 그 학생의 점수는 B-가 나왔습니다. 모든 과목에서 A+ 못 해도 A만 받는 친구였는데 말이죠.



계몽과 민주화의 과제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념의 시대가 지나고 나자 젠더 이슈, 페미니즘 이슈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든 기성세대에겐 젠더 이슈와 페미니즘 이슈가 말세의 징조, 사탄의 마지막 책략과 같은 걱정, 불안,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모양새입니다. 입장에 따라 매우 과격한 보수 우파의 목소리와 결합됩니다. 주류 사회에서 희미해져 가는 존재감을 만회할 절호의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이제는 교회에서 진행하는 어떤 행사도 동원이 어려운데 "동성애 척결! 주사파 척결!"과 같은 자극적인 구호로 행사의 당위성을 내세웁니다. 차분한 논의는 없고 일방적 주장, 선동과 분노만이 가득한 곳입니다.


젊은 세대에겐 가뜩이나 인기 없어지고 있는 기독교, 교회가 초고령화, 우경화하는 모습이 더 이상 자신들과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 확신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젠더 이슈, 페미니즘 이슈에 대한 찬반을 떠나 인식의 기본값이 기성세대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더 뼈저리게 느낍니다.


2.

교회 안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하나님 말씀을 어긴 대역죄, 금기어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설교하고 기도하고 서슴없이 판결을 내리던 이들의 자녀 손들 중에도 조금씩 이혼한 가정이 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신성모독, 인본주의의 대표적 사례에 해당되는 죄에서 '에휴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어떻게 완벽한가? 다 부족한 죄인인 것을...차라리 헤어질 거면 빨리 헤어지는 게 죄도 덜 짓는 것이지' 이렇게 갑자기 이해가 가능한 실수 정도로 가벼운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실수로 강등되는 과정에 교회 권력자 자신들의 현실적인 부끄러움과 합리화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자신은 어떤 문제나 죄로부터 완벽하다 자부하던 기준에 흠집이 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남을 욕하고 비난하던 우월주의의 기반이 무너지자 태세를 전환한 것입니다. 그토록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목청을 높여서 정죄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내가 잘 모르는 일이 마귀의 일이 되고 사탄의 말세 책략'이 된 것입니다.


내 아들과 내 딸이 이혼하기 전까지는 왜 사람들이 이혼하는 지를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내가 모를 때 다른 사람이 이혼하면 그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이고 말씀을 어긴 것이고 기도를 안 한 것이라 마음대로 손가락질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일에 대해 함부로 혐오 발언을 하거나 종교적 판단을 일삼는 모습은 그야말로 공감 능력의 부재이자 무식한 일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관계 중심적으로 역지사지하지 않고 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낮아짐, 눈높이 사랑을 하신 예수님께서 사신 모습과 정반대의 길로 가면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자가당착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자들에게 주신 이성과 감성 중에 이성은 쏙 빼놓고 호불호의 감정적 반응만 남은 반쪽 짜리 인간, 반쪽 짜리 신앙입니다.


이러니 내 아들 내 딸이 이혼하자마자 모든 이유 갑자기 다 손쉽게 설명이 되는 신기한 기적이 일어나 버립니다.


자칭 보수 기독교인들이 젠더 이슈나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함부로 지적하고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모습이 정말 성경적인 이유 때문일까요?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내가 목사, 장로로서 솔직히 그러면 안 되지만 우리 안에 사실 돈 문제는 있었다, 성 문제도 있었다, 술수와 거짓말 문제 있었다, 술 담배 못 끊은 사람 있는 거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 안에 동성애자는 절대 없다! 적어도 나는 동성 성 행위자가 아니다, 성 정체성만큼은 굳건하다, 트랜스젠더 목사 봤는가? 바이섹슈얼 장로 봤는가? 레즈비언 권사 봤는가?...이런 무지한 자신감, 남의 일로 생각하는 타자화/대상화, 그래서 그들보다는 내가 우월하고 말할 자격이 생긴다고 보는 권력 의식...


여기에서부터 자칭 기독교 보수우파의 근본 동력이 생긴다고 생각됩니다. 모든 성경구절 인용,  성소수자 교정 이론, 성소수자 성문란 폭로 등의 논리는 무지의 민낯을 면하려 덧칠하는 구색에 불과합니다. 나는 다른 문제는 다 인정해도 성소수자 이슈만큼은 해당될 리가 없지! 너도 그럴 거야?!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폭력적인 전체주의가 모든 혐오와 자칭 보수우파 선동이 출발되는 지점입니다.


3.

일반 사회에서 젠더 이슈나 페미니즘 이슈,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상당히 상세하고 다양한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서구에서는 일찌감치 세밀한 당사자성을 앞세운 연구자들도 많이 있을뿐더러, 한국 사회도 이제 깜짝 놀랄 정도로 논의가 많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 및 퀴어 문학, 퀴어 콘텐츠가 급증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교해지고 있는 것을 통해 상황을 실감합니다.


그에 비해 교회의 대응은 아직도 멀어 보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LGBTAIQ+를 비롯해 폴리아모리 논쟁까지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와 교회 안에서는 아직도 동성애는 절대 안 된다, 동성애자들은 항문성교와 난교 파티를 즐긴다,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기저귀 차는 여자가 교회에서 뭘 하냐? 이런 말이 아직도 실제 육성으로 들리고 있습니다.


근거 구절로 내세우는 성경을 인용하는 태도가 너무 가벼워서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이혼에 대한 급격한 태세 전환처럼 말씀을 생명처럼 여긴다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성경을 코에도 붙였다 귀에도 붙였다 자기 편리에 따라 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항문성교 묘사에 그토록 집착하는 목사가 악수를 청했을 때 정말 깜짝 놀라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가운데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여 상대 손바닥 중앙을 간지럽히는 희롱을 하며 희죽 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변태 목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소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저들은 지들이 하고 있는 일이 뭔지 도무지 알지 못하나이다! 이렇게 용서를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자기 입맛대로 마음껏 인용하는 성경에는 의외로 의견이 엇갈려 살기가 올라오고 군중 심리가 폭력화될 때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기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 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사도행전 5:34-39)


일단 잘 모르겠으면 화내고 난리 치고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일을 크게 만들기 전에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는 거죠.


잘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악마화하고 실컷 욕한다 해서 순전히 자기 잘못 때문에 떨어진 존재감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중요한 사람이 되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그냥 더 추해질 뿐이죠.


그냥 가던 길이나 가시길 바랍니다.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아무나 붙잡고 시비나 걸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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