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몸이 아플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자책입니다.
아프거나 다쳤을 때 가족이나 주변에 비아냥대기 좋아하는 기독교 오지라퍼들이라도 있다면
'거봐라 기도 안 하더니...쯧쯧'
'주일 빼먹고 놀러 가더니 다쳤네~! 벌 받았네~~~'
'니가 그딴 식으로 하나님께 엉터리로 하고 잘 되길 바라는 게 이상한 일이지'
와 같은 소리를 듣기 십상입니다.
이런 소리를 들었을 때 부아가 먼저 치밉니다.
하지만 막상 뒤돌아 서서 혼자 생각해보면 진짜 그런가? 하는 불안감이 드는 것도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아픈 것과 내 평상시 날라리 같은 신앙생활의 연관성이 없다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찾아보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성경에도 내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아프게 된 건가? 싶게 마음이 찔리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잔뜩 나오는 뭐뭐 하지 마라!는 명령들도 그렇고 신약 성경에도 그냥 넘기기에 찜찜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베드로전서 4:1~3)
성경 구절을 접할 때 매번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으로 접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구절을 보면 성적인 문제가 있거나 술을 자주 마시거나 방탕하게 향락을 추구하거나 무당을 찾아간다든지 타로점을 봤을 때 육체의 고난을 받아서 아프게 된다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아프면 좋아하는 술도 더 이상 마실 수가 없게 되고 놀러 다니지도 못할 테니까요. 몸이 괴로워 '죄를 그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싶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전서 2:20)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고 벌로 매를 맞으면 몸이 아프게 된다는 뜻으로 다가오는 구절입니다. 성인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매를 들어도 항거불능 상태가 되는데 신이 사람에게 매를 든다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교회에서 흔히들 말하는 '하나님께서 몸을 치셨다'는 표현이 이런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2.
요즘 의술이 꽤 발달됐습니다.
발달된 의술을 하나하나 보며 신기한 것도 있지만 의학이 발달하는 동안 사람들의 보편적인 의식 수준이 막연한 미신이나 두려움으로부터 많이 벗어나고 있는 점이 더 흥미롭습니다.
특히 정신의학과 진료를 받는 경험들이 늘어나고 심리상담, 성격검사 콘텐츠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개인적인 무지와 불안감이 자의적인 허상과 불합리한 편향을 만들어 치우치게 되고 여기에 종교적인 미신과 윽박지름까지 가세해 사람을 더 궁지로 몰아세우던 혹세무민의 기술이 잘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술병이 났을 때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을 술로 오염시킨 죄를 회개하기보다 숙취해소제를 먹고, 마음이 괴롭고 약해질 땐 기도에 게을러져서 이겨내지를 못하는 건가? 기도원으로 달려가는 대신 우울증 약을 처방받는 식이죠.
가족을 무척 힘들게 하는 가장이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만취상태로 밤 12시 이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귀가하여 집안 물건을 때려 부수고 밤새 가족을 괴롭히고 손지검을 일삼는 알코올 중독 가정폭력 가해자의 전형이었습니다. 장기간의 지나친 음주와 흡연이 원인이 된 것이 분명한 대장암과 폐암 판정을 50대 중반에 받았습니다.
그런 가장과 달리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아내와 자녀들은 내심 이번 기회가 아버지가 극적으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신앙적인 회심까지는 안 가더라도 적어도 아버지가 인생을 스스로 돌이켜보며 음주와 흡연으로 자신의 건강을 이렇게 해치고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줬구나 후회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가장은 서울대학교 병원의 최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성공적인 수술과 방사선 치료 후에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본인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도 않았고 병상에서 늘 강력하게 주장하던 말도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일체 하지 않고 나아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앙에 귀의하거나 기도의 흉내를 내기는커녕 오직 마인드 컨트롤과 최고의 의술만으로도 건강을 회복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회복된 아버지의 건강을 보며 당연히 기뻐했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에 걸친 알코올 중독 폭력을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이 오직 기독교 신앙의 힘으로 간신히 다스리며 살아왔던 피해 가족들이었습니다. 건강해진 아버지를 보면서 오히려 망연자실 하나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심한 현타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본인의 음주 흡연으로 심각한 육체의 고난을 받았으나 신앙에 귀의하여 죄를 회개하거나 삶을 돌이키지 않은 상태로도 현대 의학을 통해 거뜬하게 건강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정의도 실현되지 않았다고 느껴졌고 여태 아버지를 위해 했던 모든 종류의 기도가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응답받은 것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가장은 건강을 회복하고 난 뒤 다시 음주와 흡연을 즐기고 가족을 똑같이 괴롭혔습니다.
의술의 발달이 가져온 대표적인 부정적 사례라 하겠습니다. 잘못된 미신도 어설픈 종교도 이 불의한 상황에 개입하여 피해자들을 구해줄 조금의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3.
죄가 있어 벌을 받고 병을 얻거나 장애를 갖게 된다는 생각은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흔한 생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한복음 9:1-2)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시각장애인을 두고 본인이 죄를 지었거나 그 부모가 죄를 지어서 장애를 얻게 되었다고 확신한 상태로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요한복음 9:34)
예수님과 대척점에 있었던 바리새인들도 같은 시각장애인을 두고 온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난 자라고 규정하여 혐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던 건강에 대한 통념과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9:3-4)
건강에 문제가 생긴 원인이나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해 다들 하는 것처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누군가를 탓하는 방식의 사고를 멈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이 상황에 실제적으로 대처하고 하나님께서 현재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담이나 정신의학에서도 지금의 문제 원인을 어머니와 어떤 관계였습니까?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습니까? 과거의 트라우마가 무엇입니까? 이런 식으로 과거를 고백하고 과거를 파헤치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찾아가는 경우가 익숙합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소수 의견이긴 하나 과거는 오히려 불문에 부치고 현재의 불편함과 괴로움을 당장 어떻게 다룰 것인가? 곧장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현재의 실천 방법에 집중하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과거에 집착하여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도리어 자신이나 타인을 원망하도록, 고통의 무게에 더 주저앉도록, 결국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해결할 수조차 없는 원인을 따져 물어 죄책감을 유발하고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방법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이나 장애, 건강 문제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바라보실 때, 지금 당장 무엇을 저 사람을 위해 할 수 있으며,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가? 내가 곧 실행해 옮길 일은 무엇인가? 에 초점을 맞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부모 탓하고 과거에 내가 했던 실수를 후회해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냐? 는 거죠. 게다가 그런 책임전가와 후회가 앞뒤 연관성조차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미신과 사람들의 카더라 썰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더더욱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누구의 죄라고, 무엇 때문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자들이 가장 문제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진정으로 회복시키고 위로하기보다 이 상황에서조차 고통받는 이들을 자기 권위 아래 무릎 꿇게 하여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가스라이터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누가 내게 현재를 직시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증명할 수도 없고 분명치도 않은 인과관계를 반복하여 세뇌시키는 자들의 말을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몸이 아플수록 생각만큼은 더 똑바르게 해야겠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혹여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할지라도 더는 나빠지지 않기를, 지금보다 나빠질 수밖에 없다면 그 가운데 주어진 의미를 좀 더 깊은 깨달음과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