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마가복음 1:14)
화가 나면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가 나를 완전히 삼켜버렸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화났다는 것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 모든 일을 멈춰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내가 그만큼 화가 났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관심 자체가 없습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나 자신도 내가 살아가기 급급한데 타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만큼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표현은 호의적인 관심 대신 의아함과 부정적인 반발심을 일으킵니다.
더구나 내가 화가 났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게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일을 그르치게 되면, 사람들은 내 감정을 우선적으로 돌아보기보다 그들이 겪는 불편과 떠안아야 하는 손해로 인해 부정적인 에너지를 품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문제에 반응하는 나의 방법 때문에 문제가 곁가지를 뻗으며 더 커지고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의 효율성을 위해 아무리 내 감정이 힘들어도 여러 사람이 관련된 일은 표시 나지 않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나는 신경 써야 하는가?'라는 더 억울한 감정이 솟구칠 수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더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리고 문제 해결을 단순화하기 위해 화가 난 자신에게 집중하거나 일을 멈춰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는 복수심을 잘 다뤄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님도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무리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의미도 됩니다. 실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요한복음1장)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신 첫 번째 말씀도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습니다.(마태복음3장, 4장) 선생님으로 모시던 세례 요한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이 느꼈을 분노는 사람의 감정 상 다스리기 어려운 성격의 정당한 것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입장에서 당장 어떤 중대한 조치를 취해야 할 사안이었습니다. 즉각적인 복수를 다짐한다든지 부당한 체포와 투옥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조직한다든지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하던 '일'을 지속하는 것에 자신들의 힘을 집중시켰습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부당하고 억울한 감정에 주목하거나 세례 요한을 부당하게 괴롭히는 권력자들을 증오하고 복수의 칼을 가는 데 집중시키지 않았습니다.
감정의 흐름조차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도록 방치하지 않고, 훗날 '~~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자신 없는 변명 대신 모든 변수가 자리를 잡고 칼을 뽑지 않아도 상황이 정리되는 무르익음을 기다리며 감정에 합당한 정당성이 부여되는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 여러 미숙함 때문에 문제 해결에 불필요한 곁가지를 만들어내지 않고 문제 해결이라는 목표에만 충실한 사람. 힘들지만 가장 덜 힘들게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불행의 무게를 덜어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덜 불행해지는 것도 작은 행복입니다. 내려가는 것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