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포비아
A(SNS 글쓰기 플랫폼, 이하 같음) 작가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3년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여전히 아마추어 초보 작가 수준이다. 출간한 것도 아니고, 응모에 당선된 적도 없으며, 그렇다고 구독자 수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만족으로 쓰고 발표하는, 그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 작가이다. 사실 A에서 붙여준 작가라는 타이틀도 쑥스럽기 그지없다.
다만, 3년 동안 3개의 브○○북을 발간했고 2개의 매거진을 운용하면서 100편이 넘는 글을 썼다. 평균적으로 한 달에 3편 정도를 쓴 것이니 나름 게으름 피우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아직 잘은 모르지만, 글을 쓰는 재미는 생성(生成)에 있는 것 같다. 텅 비어 있던 공간이 내가 의도한 글자와 단어, 문장으로 차곡차곡 채워지는 맛이 쏠쏠하다. 그만큼 머릿속, 마음속 무거운 상념을 덜어내는 반사적 이익도 있다.
물론,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을 거스를 수는 없기에, 약간의 공감과 응원을 기대하며 열심히 발표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처음 '작가 소개'에서 했던 다짐에 충실하고 있다.
"뭘 해냈다는 느낌보다는 ‘세상이’ 에게 다 빨리고 빈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휑 하지만,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하는 걱정 따위는 없고 하루하루가 달콤하다. 가끔 놀면 불안해지는 병이 쳐들어와서 이놈을 물리치기 위해 글쓰기를 해 볼까 한다. 더는 경제 활동 인구는 아니지만, 창조적인 삶을 살아볼 작정이다."
요즘에는 '엔데스 굿, 알레스 굿'이라는 타이틀로 자전적 에세이를 쓰고 있다. 소재는 '60이 훌쩍 넘어 돌아보는 나의 인생길'이다. 지난 일 년에 걸쳐 총 40편의 초고 작성을 완료하였다. 이걸 바탕으로 n차 반복 퇴고 작업을 거쳐 매주 A에 연재하고 있다.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은 초고도 중요하지만, 퇴고가 핵심이라고 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초고는 늘 쓰레기다'라고 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일은 마라톤을 뛰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퇴고는 그보다 더 지루하고 고통스럽다'라고 했으며, 레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완성하는 데 6년이 걸린 이유는 그 기간 내내 고치고 또 고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내년까지 연재가 끝나면 그동안 쓴 글을 총망라하여 정리한 다음, POD 방식의 종이책으로 셀프 출간할 계획을 하고 있다. SNS 같은 온라인 매체도 좋지만, 책의 진정한 묘미는 종이책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필명으로 출간된 나의 이야기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인생이 허허롭다고 느껴질 때마다 페이지를 넘겨 보면서 추억에 잠겨볼 작정이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런 나의 소박한 계획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연재 요일인 목요일에 에피소드 한편을 발행하고, 이어서 다음 주 발행할 글의 퇴고를 시작하기 위해 A사이트에 접속했다. 작가의 서랍에 들어간 다음, 저장글 목록에서 해당 글을 찾으려 마우스를 아래로 스크롤했다.
최근 저장한 글이 상단에 표시되므로 과거에 작성한 글을 찾으려면 아래로 가야 한다. 그런데 중간쯤 내려가던 글 목록이 더는 내려가지 않고 버퍼링이 걸렸다. 컴퓨터 화면 하단에는 작은 점 세 개가 세로로 나타나 깜빡거리며 '잠시 기다리면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였다. 1분, 2분, 3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게 대체 왜 이러지? 내 컴퓨터나 인터넷 연결에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확인할 거 다 해보고, 새로 할 거 다 해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휴대폰 앱이나 탭으로 들어가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예 버퍼링 걸린 작은 점 세 개조차 없고 그냥 그 상태로 정지되어 있었다. 마치 거기까지가 저장 목록의 끝이라는 듯.
하지만 아니다. 아직 그 아래에는 지난 일 년 동안 초고를 써서 보관 중인 글들이 올라오지 못하고 잠겨있다. 총 40편의 저장글 중에서 이미 발행한 8개와 저장 목록 상단에 노출된 20개를 제외한 나머지 12편이었다.
아마도 뭔가 시스템에 에러가 발생한 것이 틀림없다. A 운영자도 분명히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을 것이고 뭔가 빠른 회복을 위한 조치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 이런 상황에 부닥친 사람이 나뿐이겠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2015년부터 시작해서 등록 작가 수 9만 5천 명, 누적 게시글 약 800만 개라는 위업을 만들어낸 10년 역사의 A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는가.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분명 지금쯤이면 에러가 복구되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A를 열고 작가의 서랍에 들어가서 저장글 목록을 아래로 천천히 스트롤해 내려갔다. 제발! 제발! 내 글들이 무사하기를 빌면서. 그러나 기대는 여지없이 무참히 깨져 버렸다. 여전히 어제처럼 작은 점 세 개가 세로로 늘어서서 깜빡거리고 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고다. 아니 재난이다. 혹시라도 백업을 받아 놓은 자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어 보고 컴퓨터 폴더를 뒤졌다. 그러나 하지도 않은 백업 글이 짠하고 나타나 줄 리가 만무하다.
눈앞이 캄캄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손이 떨려서 마우스를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A에서만 작가 소리를 듣는 초보 작가지만 그 사라진 글들이 나한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그것들을 써내기 위해 나름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짜내고 쏟아부었다.
만약 이게 어쩔 도리가 없는 현실이라면 과연 나는 12개의 글을 다시 복원해 낼 수 있을까? 한 편에 공백을 제외하고 평균 5,000자 정도였으니까 총 60,000자의 글자를 다시 기억에서 불러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12개의 에피소드 테마와 소재를 다시 떠올릴 자신이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자포자기뿐이었다.
종이책 출간을 최종 목표로 시작한 지난 일 년간의 글쓰기는 이렇게 허무하게 무산되어 버렸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연재를 중단하고 기존의 글들은 모두 삭제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A를 쳐다보지도 않으리라. 내 글 물어내라고 소송이라도 제기하고 싶지만 내가 무슨 저명한 인기 작가도 아니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그러니 이 억울함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일단 그쪽에 직접 물어보아야 한다. 무슨 일인지, 복원 가능한 상황인지 아니면 지금 내 생각대로 이대로 날려 버린 것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카○○ 고객센터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매번 느끼는 심정이지만 AI 시대가 도래하고 나서는 어느 고객센터이든 '사람 상담원'과 연결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이리저리 헤매기가 일쑤이다. 직접 통화할 수 있는 번호는 아예 찾지도 못하였고 챗봇이 어쩌고저쩌고는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문의 사항'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글을 올릴 수가 있었다. 그게 맞는 방법인지, 적정한 경로인지는 상관없었다. 어쨌든 접촉해 봐야 가부 간의 답이 나올 테니까. 문의 사항에 최대한 간단하게 글을 올렸다. 고객 상담하시는 분들도 바쁠 텐데 장문의 글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A 작가의 서랍 저장글에 들어 있던 저의 글이 보이지 않아요. 하단부에 작은 점 세 개만 깜빡이고 더는 아래로 스크롤이 되지 않습니다. 빠른 조치 부탁합니다."
하루를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메일로 문의 사항이 접수되었다는 응답뿐이었다. 다음 날, 다시 한번 똑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다. 이번에는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화면을 캡처해서 파일을 첨부했다. 진짜 이게 마지막이라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또 다음 날, 이번에는 이메일을 먼저 확인했다. 제목에 'Hi. This is k○○○○'라고 적힌 것은 전날과 같았다. 어라? 그런데 뭐가 있다. 어제와 달리 내용이 있다. '오류가 발생하는 문제를 확인하여 조치하였으며 계속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빠르게 이메일을 닫고 A를 열었다. 작가의 서랍에 들어가서 저장글 목록을 아래로, 아래로 천천히 스크롤했다. 행여 빨리하면 녀석들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그런데 있다. 글들이 살아있다. 작은 점 세 개가 깜빡거리며 멈추어 있던 곳으로부터 하단으로 더 내려가지면서 숨겨져 있던 저장글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오!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다. 즉시 USB 하나를 사 왔다. 혹시라도 이런 일이 또는 이와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A에 있는 나의 모든 글을 복사해서 아래한글 파일로 만든 다음 이를 USB에 저장하는 방식으로 백업받았다. 100개가 넘는 글이므로 100번이 넘는 단순 반복 작업을 하다 보니 진즉 그때그때 해둘 걸 하는 후회와 함께 짜증이 밀려왔다.
우습게도 그러는 동안 자꾸 옛날 생각이 났다. 만약 옛날처럼 글을 원고지에 작성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시대착오적인 생각 말이다. 신입 사원 당시 OJT를 담당하던 사수가 컴퓨터를 가르쳐 주면서 맨 처음 한 말이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중간 저장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작업이 끝나면 반드시 복수의 저장소에 꼭 저장하세요. 만약 이런 것을 소홀히 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막 IBM5550 같은 PC가 보급되어 사무에 사용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렇게 귀에 못이 박이게 듣고 배우고 실행한 가장 기본적인 안전장치를 나는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니 오류를 일으킨 카○○를 비난할 것도 없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완벽을 추구한다 해도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일이다. 당연히 이런 이슈가 카○○에만 생기는 것도 아닐 것이고 또 잠깐 애를 태우기는 했지만 이른 시일 내에 원상 복구시키는 기동력과 문제 해결력은 칭찬받을 만하지 않은가. 만약 딱 잡아떼거나,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나왔다면? 그 피해는 오롯이 내가 덮어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쨌든 내 글을 살려준 이들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내는 온라인 뱅킹을 선호하지 않는다. 종이로 된 통장을 손에 쥐어야 비로소 안심된다고 한다. 그때마다 나는 시대적 감각이 떨어진다며 아내를 비웃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말이 아니었다. 노후의 생계비에 보탤 정도로 적은 돈이지만 나는 편의상 모든 금융 거래를 온라인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만약 말이다. 해당 금융 기관의 온라인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거나, 요새 세상을 온통 시끄럽게 하는 해킹 사고가 발생하여 예금이, 아니 예금 관련 데이터가 온라인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물론 자라 보고 놀란 토끼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지나치게 공포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세상만사가 그렇게 허술하고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니까.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온라인 자산에 대해 최소한 표지라도 캡처해서 별도의 저장소에 담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입증할 수 있는 실체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온라인 포비아에 맞닥뜨리면 그거라도 보여주면서 어떻게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울러 요즘은 누구나 휴대폰에 많은 사생활과 전 재산을 담고 다닌다. 앞으로는 예측 불가의 리스크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휴대폰에 덜 의지할 수 있을지도 방법을 연구해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AI와 ROBOT로 정의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인류 문명이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를 향해 치닫고 있는 이때에 내 생각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당연히 문과적 사고(文科的 思考)에 치우친 것이고 지나친 걱정이겠지만, 작은 소동을 한 번 겪어 보니 막상 온라인 포비아가 닥쳤을 때 내가 대처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각자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