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에 빠져들게 된 순간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는 의지도 없이 빈백에 파묻혀 유튜브를 본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밖은 분명 밝았는데 어느 순간 방에 불을 켜야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방 전체를 밝힐 필요는 없다. 나에게 필요한 건 스마트폰 액정에서 나오는 작은 불빛이었다. 그렇게 해야 나의 초라함이 그나마 덜 비취는 것 같았다.
40대, 고도비만, 고혈압, 고지혈증, 아. 다행히 당뇨는 없다. 하지만 지난해 한 건강검진에서의 수치는 간당간당했다. 빌어먹을. 그것 하나만큼은 위안이 되었는데. 재산보다 빚이 더 많다. 아무리 벌어도 다 갚을 수 없을 것 같은 큰 숫자를 보면 현실 감각이 점차 없어진다.
‘그래! 이렇게 우울할 땐 술이지.’
방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책장은 어느새 술장으로 변했다. 1년 전부터 차곡차곡 술을 모았다. 발베니, 맥켈란, 각종 브랜디, 증류주 등 50병 정도를 빼곡하게 채워뒀다. 단언컨대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 조니워커 블랙라벨을 살 때만 해도 말이다.
종량제 봉투를 사러 편의점을 들렀을 때 아무런 생각 없이,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술을 한병 집어 들었다. 그전까지는 술을 싫어했다. 진짜다. 내 몸의 겉은 술을 잘 먹게 생겼지만 오장육부는 술을 받아들이질 않았다. 무엇보다 초록색 병에 담긴 그 ‘소주’는 정말 싫었다.
‘맛도 없는 술을 왜 마시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회식에서 소주를 건네주고 마시고 다시 건네고, 나에게 술은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맺기 위한 하나의 수단밖에 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위스키를 산 것이다. 슬리퍼를 신고 아무렇게나 걸친 검은색 플리스와 무릎이 튀어나온, 입고 나가기에는 부끄럽지만 40대 아저씨이기에 창피하지 않는 잠옷 비슷한 바지를 입고 재활용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나서 들린 편의점이었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사러 체크카드 하나 들고 간 편의점이었다. 카운터에서 일하는 분에게 10리터 종량제 봉투 10개를 달라고 말하고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조니워커 블랙라벨을 보게 됐다. 그리고 샀다.
조니워커 블랙라벨을 품에 안고 집으로 향했다. 손에 닿는 병의 느낌이 좋았다. 사각병에 들어있는 술의 무게감이 찰랑찰랑 느껴지니 살짝 흥분되기도 했다. 학창 시절 약간의 일탈을 하며 느꼈던 묘한 설렘도 함께 느꼈다. 그게 뭐라고, 내 돈으로 처음 ‘양주’를 샀다는, 그것도 아내와 상의하지 않고 샀다는 사실에 묘한 셀렘을 가지고 집으로 들었갔다.
아내와 딸은 안방에서 잠이 들었다. 거실은 조용했다. 소주잔을 하나 집어 들었다가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머그잔을 들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따다다닥’ 스크루캡을 힘껏 돌리자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천천히 향을 맡았다.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한 두 번 술자리에서 마셔봤던 그 냄새였다. 오크통을 본적도 만져본 적도 없지만 이게 오크통 냄새구나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향을 강하게 느꼈다. 그런데 20대와 30대에서는 느낄 수 없던 달콤한 냄새도 느꼈다. 소주를 마시다가 ‘오늘은 술이 좀 달다!’라고 말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몇 번 정도 소주가 달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조니 블랙에서 느꼈던 달콤한은 달랐다. 바닐라, 캐러멜 같은 향이 흐릿하지만 확실하게 느껴졌다.
머그잔에 술을 따랐다. ‘콜골콜’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잔을 채웠다. 본 것은 있어서 잔의 밑부분에 낭실거리게 따랐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향을 맡기 시작했다. 병을 들고 맡았을 때 보다 더 선명하게 코를 자극한다. 오크향보다 달달한 향이 더 지배적이다. 바닐라의 느낌도 있고 후추 같은 매콤하지만 기분을 좋게 만드는 향도 느껴진다. 자! 향은 맡을 만큼 맡아봤으니 이제 맛을 볼 차례. 조심스럽게 잔을 기울였다. 처음 마시는 순간이라 그런지 얼마나 기울여야 하는지 몰라 아주 천천히, 어색하게 잔을 기울였다. 그러다 입술에 와닿는 조니 블랙. 처음 입술에 닿은 느낌은 ‘부드럽다’였다. 액체이지만 점성이 높다고 해야 할까. 이제껏 마셨던 여러 액체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무겁지만 부드럽고 점성은 있는 듯하지만 스르륵 넘어가는 그 느낌. 체온보다 조금 낮은 온도 때문에 더 묵직하게 입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향을 맡을 때보다 더 강렬한 향이 입안 가득 채워졌다. 꿀꺽 삼키니 식도를 따라 흘러 내려가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었다. 어릴 적 연필을 씹었을 때 느꼈던 맛도 떠올랐고 달달하지만 쌉싸름한 맛도 함께 느껴졌다. 강렬한 향과 생각보다 부드러운 맛이었다.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조니 블랙보다 비싼 술들을 이것저것 마셔봤다. 4단 책장에 내 통장 사정을 생각하면 과하다 싶을 그런 술들도 자리하고 있지만 처음 조니 블랙을 열고 느꼈던 그 감정은 잊을 수 없다.
첫 경험 이후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글랜캐런 잔에 술을 따르고 스월링을 하고 향을 맡고 맛을 음미한다. 많은 종류는 아니자만 그래도 이것저것 먹어봤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오픈런도 해보고 면세점, 해외 리쿼샵 등 다양한 곳에서 술을 찾아다녀봤고 위스키에 관심 있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도 하고 설명도 하면서 얇디얇은 지식을 뽐내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이제야 깨달았다. 난 술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맛있는 걸 마시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맛있는 술을 마시며 내 삶을 한번 이야기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