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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술꾼 Feb 14. 2023

대기업에서 만든 바로 그 맛!

오뚜기 스프와 블랜디드 위스키


요리에 관심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주방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결혼 뒤였다. 아내가 육개장을 끓이고 몸살로 사흘을 앓아누워있는 것을 보면서 음식은 내가 해야겠다 마음먹고 나서부터 되든 안되든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다. 


큰맘 먹고 10만 원대 오븐을 하나 사서 빵을 만들기 시작했고 주말 아침이면 빵과 샐러드, 오믈렛과 과일 등을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한식뷔페에서 옥수수 수프를 너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았다. 매번 빵과 샐러드만 준비하기에는 너무 단조롭다는 생각을 하던 차여서 바로 수프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레시피를 찾아봤다. 만들기 어렵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단순하지는 않았다. 밀가루와 버터로 루를 만들고 우유를 넣어 점도를 맞추고 치즈와 통조림 옥수수를 넣고 함께 갈아낸 다음 설탕과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옥수수를 알알이 까서 토핑으로 얹어 냈다. 그리고 전날부터 반죽을 시작해 아침에 갖구워낸 식빵과 함께 식사를 준비했다. 맛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7시부터 시작한 아침 식사 준비는 9시가 넘어서야 끝났고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니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며 '점심은 뭐 먹지?'라는 생각을 하다 사 먹는 것이 얼마나 간편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오뚜기 스프는 정말 위대한 음식이다. 오랜 시간 끓여야 되는 옥수수 수프를 물과 가루만 넣어 대충 휘저으며 끓여 주기만 해도 비슷하게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맛이 조금 다르기야 하겠지만 이것저것 맛을 추가하기만 해도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을 확 줄여주는 음식을 내놓을 수 있게 만든다.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간 경양식 집에서 주문을 마치고 나면 나오는 그 수프 맛. 한 스푼 떠먹으면 어머니와 함께 갔던 촌스럽지만 나름 분위기 있는 그런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바로 그런 맛이다.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는 것은 그 맛을 유지하고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재료값 상승으로 대체제를 찾고 세월이 지나면서 변해버린 재료의 맛을 대체하고 비율을 달리하면서도 맛을 일정하게 맞추는 수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조니워커 그린라벨. 조니워커 시리즈 중에서 몰트 블렌디드 위스키로 그레인 위스키를 섞지 않았다. 맛과 향이 좋은 위스키이며 가성비가 좋다. 기회가 되면 꼭 마셔보길 권한다. 

오뚜기 스프나 여타의 공장식 제품들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수프를 떠올리며 블렌디드 위스키를 떠올렸다. 세월이 지나도 비슷한 맛을 유지하는 점에서 그런 것이다. 발아된 보리로 술을 만들어 증류하고 오크통에 숙성시켜 몰트 위스키를 만든다. 그 몰트 위스키에 보리 외의 곡물로 만든 그레인 위스키를 섞어 블렌디드 위스키가 탄생한다. 블렌디드에도 세분화된 종류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니워커, 시바스 리갈, 발렌타인 등은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를 섞어 만든 블렌디드 위스키이다. 몰트 위스키의 강한 개성에 그레인 위스키를 넣어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양주 맛'을 만드는 것이다. 


위스키는 매우 섬세한 술이다. 증류한 술을 오크통에 넣어 숙성고에서 숙성시키는데 오크통의 위치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진다고 하고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크통의 영향에 따라 그 맛이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그런 다양한 술들을 섞어 한결같은 맛을 유지하는 데는 섬세한 노력이 따를 것이다. 싱글몰트가 대세인 요즘. 위스키를 구입하기 위해 오픈런을 넘어 폐점런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요즘. 블렌디드 위스키는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는 못한다. 흔한 블렌디드 위스키보다 희소성이 높은 싱글몰트에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블렌디드 위스키 중에도 히비키 하모니나 조니워커 그린라벨 같은 구하기 힘든 위스키도 있기는 하지만 대세는 확실히 싱글몰트이다. 

그럼에도 블렌디드 위스키가 시장을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는 맛'이기에 그런 것 아닐까? 익숙한 맛, 기대했던 딱 그 맛,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 맛, 그런 요소들이 블렌디드 위스키가 시장을 지켜온 기대 요소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위스키를 마시다 보면 새로운 맛을 찾게 된다. 구하기 힘든 위스키도 마셔보고 싶고 내 술장에 남들이 가지지 못한 위스키가 있으면 왠지 모를 뿌듯함도 느껴진다. 어렵게 어렵게 내가 원하는,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위스키를 구했을 때의 기쁨은 매우 크다. 하지만 꼭 위스키를 과시하기 위해서 모으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늘 새로운 맛을 추구해서야 되겠는가. 

장 보러 가서 가볍게 한 병 가지고 올 수 있는 그런 위스키도 애호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지 않는가. 오뚜기 스프를 뛰어난 음식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추억의 맛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것처럼 블렌디드 위스키 또한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사랑받는 위스키라 생각한다. 

위스키는 즐겁자고 마시는 것 아니겠는가?

즐기자. 즐겁게 위스키를 마시며 인생을 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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