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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Sep 26. 2022

해내는 방법

어떻게 시작하냐고 물어보신다면.

     사람들은 종종 문학번역을 시작하는 방법을 내게 묻는다. 상세하게는 어떤 장비를 살지, 프로그램을 사용할지, 누구의 강의를 들을지,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야 도움이 될지 까지도 묻는다. 돈을 벌기도 전에 써야 하는 목록이다. 주로 강연이나 박람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물어오기 때문에 나는 상대에 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상태도 한정된 시간 안에 답변해주어야 한다. 그러니 나의 경험을 빗대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냥 무작정 시작해보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어릴 적부터 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였다. 미술 시간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펜으로 완성을 하는 것처럼, 문제집을 살 때마다 첫 단원은 심혈을 기울여 풀어냈다. 그 뒤로는 지쳐서 다시 거들떠보지 않았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시작조차 못한 채 장비부터 만만하게 갖추려고 알아본다, 그 과정에 질려 포기해버린 적도 부지기수다. 끈기가 부족하다고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지적하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가 끝까지 해내는 힘이 결핍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내게 칭찬해주었다. 책을 잘 읽는다는 칭찬을. 


     생각해보니 그랬다. 초등학교 때부터 퇴마록이 나오는 족족 읽어치웠고, 판타지 소설에 빠져서 수십 권짜리 시리즈를 여럿 섭렵했다. 요즘도 머리가 휴식해야 할 때면 웹소설을 읽는데, 웹소설은 보통 단행본 5권 분량이 넘는다. 특별히 잘 해내려고 애쓰지 않고 읽으니 그저 국수 가락 삼키듯이 술술 읽어 넘긴다. 그렇게 읽다 보면 이야기는 어느새 마지막 결말을 앞두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벽돌 책 읽기 모임에 합류한 적이 있다. 수십 권짜리 판타지도 읽는데, 이기적 유전자쯤이야 가뿐히 읽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다시 튀어나왔다. 내가 알지 못하는 역사 이야기가 나오면 책을 덮고 정보를 찾았다. 공책에 하나하나 정리하느라 한 장 읽어내니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완독은커녕 도입부를 넘기지 못했다. 결국 모임 며칠 전에 부랴부랴 책을 펼쳤다. 이해는 고사하고 그저 완독을 목표로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넘겼다. 이렇게 읽고 나면 찝찝할 줄 알았는데, 마지막 장을 덮으니 상쾌한 개운함이 밀려들었다.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것도 괜찮은 방법이구나, 하는 상당한 깨달음이었다. 




     이후 나는 뭐든지 같은 방법으로 시작해보기로 했다. 설렁설렁 대충대충 문맥만 겨우 파악하게 되더라도, 첫 시도에는 끝을 보는 걸 목표로 한다. 그리고 실수가 나는 부분이나 마음에 차지 않는 지점은 잘 기억했다가 두 번째 시도에서 수정하도록 한다. 이 방법을 번역에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자리를 잡고 앉아 번역할 본문을 읽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그저 소리 내서 끝까지 읽는다. 그리고 사전을 뒤적이며 무작정 번역한다. 짧은 본문으로 시작하면 좋다.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번역해낼 거니까. 마지막 문장을 번역해낼 때까지 절대로 자리를 뜨지 않는다. 


     첫 도전에서 완벽한 문장이 나올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한 문장을 번역해냈다면 고치기 위해서 멈추지 않는다. 완벽한 번역문이 아니라 누락 없는 변환을 목표로 한다. 한 문장 한 문장 차근차근 그저 번역해낸다. 끝까지 번역한 뒤에는 덮어두고 머리를 잠시 쉰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며칠간 덮어두어도 좋다. 다음번에는 번역문만 가지고 문장을 다듬는다. 원문을 모르는 사람이 읽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두고 다듬는다. 다듬는 과정이 끝나면 원문의 한 문장 한 문장과 비교하며 의미적 격차가 벌어졌는지 확인한다. 도착어로 번역한 문장을 다듬고 원문과 비교하는 일. 이 두 가지를 적당히 반복하다보면 꽤나 마음에 드는 번역문이 나온다.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아니면 마감 날이 되어서 후다닥 넘겨야 하는 때가 오거나.)




     뭐든지 단숨에 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타고나야 하는 재능일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훑는 작업은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처럼 게으른 완벽주의자 성향인 사람도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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