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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Aug 24. 2023

당근은 끓지 않지만

99도의 당근러를 만난 어느 날

"거래 가능한가요?"

"네에"


심사숙고 끝에 나이스 타이밍을 잡아 당근 거래를 잡았다. 내일 오후 3시 어떻냐고 제안이 왔으나 나는 퇴근 후에서야 시간이 나는 직장인이므로 오늘 2시간 후는 어떻냐고 물었다. 당장 달려가서 살 마음이 있었다. 다행히도 바로 예스를 받았다. 짝꿍에게 이러쿵저러쿵 이렇게 해서 드디어 우리 집에 전자레인지가 들어올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한 두 정거장쯤 되는 가까운 곳이니 지하철을 타고 갈까 하다가 전자레인지를 들고 끙끙대며 들고 올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져서 차를 끌고 가자, 마음먹었다.


거래하시는 분의 당근 온도는 99도. 이게 가능한 온도인가? 얼마나 많은 당근을 하신 걸까, 업자는 아닐까? 업자여도 99도가 가능한가? 지나치게 높은 온도에 의심이 생길 정도의 흉흉한 세상이다. 게다가 집에 들어와서 전자레인지가 잘 작동하는지 체크해 보라는 99도의 상대방 메시지에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다. 짝꿍은 가기 전에 호신용품이라도 챙겨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으니.


당근거래를 하러 나가는 마음은 뭔가 설레면서도 두렵다.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하나, 사고 보니 고장 난 물건이면 어떡하나, 등등 낯선 이와의 만남이 주는 긴장감도 한 몫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래 시간에 딱 맞춰서 당근러의 집 1층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위잉 자동문이 열리며 쓰레기를 양손에 든 나이 드신 어르신이 등장했다.


"당근 하러 왔지요?"


쓰레기를 내놓으면서 우리에게 들어오라 손짓했다. 후추스프레이를 샀어야 했다. 잠깐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명이니까 괜찮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집에 들어섰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여쭤보시고는 가까운 곳에서 왔네 하고 허허 웃으시는 당근 어르신. 깔끔한 집안에 들어서자 나이스하게 닦아놓은 전자레인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와 정말 깨끗하네요!"


하고 현금을 꺼내 드리고는 들고 나오려는 마음만 있었는데, 당근 어르신은 99도의 온도를 몸소 뿜어 내보이셨다. 아, 이게 99 도구나... 나는 그 집에서 세상이 아직 살만한 곳임을 뜨겁게 깨달았다.


미리 물을 떠놓고 살포시 올려둔 그릇을 전자레인지 안에 넣고 30초를 돌려서 꺼내시곤 이렇게 뜨겁다며 작동이 잘 됨을 시범해 보이셨다. 그리고는 전자레인지의 각 버튼에 대한 설명과 시계를 맞추는 방법까지 하나하나 알려주시고는 안쪽에 살짝 까진 부분이 있다는 점도 명시해 주셨다. 화룡점정, 대충 줄줄 흘러내렸을 법한 전자레인지 코드는 동글동글하게 말아서 뒤쪽에 빵끈으로 묶어서 고정해 둔 상태였다. 마치 그분에게는 당근 매뉴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분의 친절함과 능숙함과 세심함에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가격에 이렇게 멀쩡한 제품에다가 이렇게 친절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 아닐까.


"당근 99도이신 분은 처음 뵀어요..."


짝꿍이 당근어르신에게 수줍게 고백하자 그분은 이 부분을 알아챘다는 사실에 흡족하신 듯 또 허허 웃으셨다.


"내가 나눔을 자주 해서 그래-"


하시며 짝꿍의 팔을 토닥토닥하시더니, 이번엔 난데없이 옆방에서 조그마한 믹서기를 꺼내오셨다.


"믹서기 있어? 필요하면 이것도 가져가요"


이것도 거의 사용하지 않으셨는지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받아도 되나? 싶었으나 짝꿍의 품 안에 고이 안겨 있었다. 신기하고 재밌고 신나고 감사한 마음에 우리는 다 같이 헤헤 웃고 있었다.


"99도면 이제 곧 끓겠어요!"

"근데 100도는 없다고 하더라고"


이런, 끓기 직전의 99.9999도인데 당근은 끓지 않는단다.


마치 잠시 들렀다가 가는 조카들을 보내는 것 같은 표정으로 99도의 당근 어르신은 우리를 배웅해 주셨다. 잠시 만난 사이인데 이렇게 친척 어르신 집에서 나오는 기분이 들 줄이야.

그 찰나에 인생이 꽤나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집에 전자레인지가 들어와서도 기쁘지만, 저 전자레인지를 볼 때마다 나는 99도의 어르신이 떠오른다. 물건 하나에 담기는 히스토리가 이렇게나 흥미로워질 수 있나. 쿠팡에서 퀵하게 주문하는 것과 전혀 다른 맛이 있다. 사는 맛이라고 해야 할까?


따뜻함이 넘치고 넘쳐 일에 지쳐 차가워진 남의 마음까지 뜨뜻하고 뜨끈하게 데우던, 8월의 당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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