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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an 12. 2021

제정신으로 살기

모래알 브런치 프로젝트 

바깥은 영하 3, 4도라는데 늘 보일러 온도를 24도로 맞춰놓은 집에만 있으니 추운 겨울이 좀처럼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코로나 19로 집안에서 지내는 생활이 길어지고 아이는 한 달째 어린이집에 등원하지 않고 있다. 초반에는 하루하루 망연자실하게 지내다가 단기간에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아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가장 현명해 보였다. 그러자면 주야장천 미뤄둔 정리를 하는 게 맞았다. 무리하면 질리니 하루에 한 군데씩, 그게 서랍 한 칸일지라도 치워보기로 했다. 엊그제는 신발정리를 했다. 좁은 현관에 신발이 넘쳐나 현관 중문에도 걸이식 신발 포켓장을 걸어뒀었다. 손님이라도 오면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두 줄로 늘어선 수십 켤레의 신발이 문짝에 걸려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현관 바닥에 신발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의 신발이 여기저기 엉켜 쌓이기 일쑤였다. 풍수지리를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현관이 깨끗해야 복이 들어온다는데... 이참에 집에 있는 신발을 모두 끄집어내 봤다. 워낙 현관 신발장이 좁다 보니 베란다에 따로 장을 두었는데 거기도 신발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그 장에 있는 신발은 1년 내내 한 번도 신지 않은 게 대부분이었다. 나는 베란다 신발장에 있는 것들을 처분하고 현관 신발을 베란다 장으로 이사시키기로 했다. 


모든 정리의 첫 단계는 전부 꺼내놓는 거라기에 거실 한쪽에 신발을 모조리 늘어놔봤다. 기가 막혔다. 신지 않은지 2, 3년씩 지난 것들이 30켤레는 됐다. 그중에는 이런 게 있었나? 싶은 것들도 있었다. 더 소름 끼치는 건 전부 내 신발이었다. 결국 내 신발들 때문에 현관이 늘 지저분했구나 생각하니 제정신이 아닌 채 살았던 것 같았다. 그중에 친언니가 준 신발도 상당했다. 언니가 내게 준 고가의 명품 신발들. 에르메0, 샤0, 버버0의 구두와 운동화가 10켤레도 넘었다. 문제는 발이 작아서 신지 못하는데도 갖고 있다는 거였다. 완전히 작아 안 맞으면 포기했을 텐데 애매하게 맞아서 어떻게든 신어보겠다고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데 제 아무리 비싼 신발이면 뭐하나 내 발에 안 맞는 걸. 일단 발이 들어가긴 해도 몇 걸음만 떼면 비명이 나오는 신발을 어떻게 신겠다고... 나는 작은 상자에 명품 신발을 따로 담아 나보다 발이 작은 엄마에게 주기로 했다. 진작에 줬으면 잘 신고 다니셨을 텐데 욕심을 부려 신발장에서 1, 2년을 빛도 못 보게 했던 게 너무 후회됐다. 낡고 유행 지난 신발은 버리기로 했다. 아이를 낳은 뒤 발이 살짝 커져서 구두는 거의 안 신고 운동화만 신고 있던 터라 정리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남편이 꼽은 내 장점 중 하나는 버릴 땐 과감히 버린다, 인데 이번에도 그 미덕(?)을 뽐냈다. 나눌 것과 버릴 것을 뺐더니 커다란 신발장이 텅 비었다. 나는 현관 중문에 걸어둔 신발 포켓장을 떼어 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문에 걸린 신발들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 기분마저 홀가분해졌다. 현관에는 현재 신고 다니는 신발만 꺼내놓기로 했다. 남편이 현관을 보더니 “우리 집 현관 바닥이 이런 색이었구나.”라며 농을 쳤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중에서 


다음 날 상자에 모아둔 명품 구두를 가지고 친정에 갔다. 엄마에게는 모자람도 부족함도 없이 잘 맞았다. 신발이 주인을 만난 것이다. 얼마 전 읽은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이멜다의 구두>에 ‘지나치면 만고의 미덕이라는 절약도 아름답지가 않고, 누구나 누리고 싶어 하는 부도 혐오스럽게 된다. (중략) 뭐든지 그것을 즐기려면 우선 제정신이어야 한다’라는 부분이 있었는데 꼭 나를 두고 한 이야기 같아서 머릿속에서 자꾸 맴돈다. 깨끗하게 정돈된 현관과 신발장을 보니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다. 신발장에 어떤 신발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나르기만 했던 내가 한심하게만 여겨졌다.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니 다행이려나. 비워야 또 채워진다고 하던데 당분간 채우기는 좀 자제하고 맑은 정신으로 지금 가진 신발을 두루두루 잘 신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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