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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n 28. 2022

봄이 돼서 세탁기를 바꿨나요?

너무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는 카피들에 대하여 

시작은 세탁조 청소였다. 연중행사(?)로 세탁기 청소를 하곤 했는데(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거지만 빨래를 한번 할 때마다 세탁망을 청소하는 게 좋다고. 난 그걸 이제 알았네) 그것도 꼼꼼히 하는 건 아니고 세탁조에 전용 세제를 붓고 ‘통 세척’을 누르는 정도였다. 그 정도만 해도 2시간 후에 각종 먼지 덩어리들이 세탁기에 받아 놓은 물 위에 둥둥 떠다닌다. 어쨌거나 웬만해선 그렇게 청소를 하고는 깨끗해졌겠지? 하며 위안을 삼았는데. 이번에는 좀 이상했다. 세탁조 청소를 했는데 더러운 오물이 계속 나왔다. 헹굼 코스로 계속 돌리고 또 돌려도 먼지가 심해지기만 했다. 빨래를 돌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드디어 세탁기 청소를 제대로 하라는 하늘의 계시로구나 싶었던 나는 업체를 수소문해서 기사님께 방문을 요청했다. 약속 날짜가 됐고 좁은 베란다에서 어렵사리 세탁기를 살펴보시던 기사님이 “이거 청소 못해요.”라고 선포하시는 게 아닌가! 이유인즉슨 세탁기가 너무 오래돼서 통을 분리하려면 나사를 풀어야 하는데 모두 부식이 돼서 분리를 할 수조차 없다고. 

“그럼 세탁기를 바꿔야겠네요?” 

“네. 어차피 지금 이 상태로는 빨래 못하니까요.”


생각해 보니 이 세탁기를 쓴 지 10년이 다 됐다. 신혼 초에 샀고 결혼한 지 11년이 됐으니. 이렇게 된 거 운명이다 생각하고 새 세탁기를 알아보기로 했다. 몫 돈 나가서 씁쓸하긴 하지만 쇼핑은 왜 이리 즐거운지. 가전제품 매장에서 구경하고 아무래도 좀 더 저렴한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새로 산 세탁기를 쓴지도 두 달이 지나간다. 강력한 물살에도 조용해서 세탁기 돌릴 때마다 아래층에 시끄러울까 조마조마하던 마음도 한시름 놓게 됐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이 글은 아주 오랜만에 쓰는 카피라이팅에 관한 글이다. 세탁기를 검색하면서 크고 작은 쇼핑몰을 여러 군데 들락날락하며 기획전이나 이벤트 관련 문구를 많이 접했다. 그런데 예전에는 나조차 그냥 지나쳤던 문구가 여기저기서 반복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아마도 너무 친근하고 익숙(?)해서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을 법한 카피. 


‘2022년 봄맞이 가전 교체!’ 


‘봄맞이’와 ‘가전 교체’는 쌍둥이처럼 늘 붙어 다녔다. 문득 왜 이걸 한 번도 지적하지 않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구독자분들께도 질문하고 싶다. 

“봄이 됐다는 이유로 가전제품을 바꾼 경험이 있나요?”

물론 인테리어 소품이나 침구의 경우에는 새 계절을 맞이하는 의미로 새롭게 교체할 수 있다. 하지만 가전제품을 그러니까 세탁기나 냉장고, TV, 에어컨 등과 같은 큰 금액의 제품을 봄맞이 용도로 바꿔본 적이 있었는가 말이다. 앞서 내가 세탁기를 바꾼 것도 구매한지 10년이 지나서다. 잘 관리하시는 분들은 20년도 쓰신다지만 나는 더는 쓰지 못할 상태가 돼서 바꾼 거다. 비슷한 시기에(신혼 때) 세탁기, 냉장고, 청소기를 사서인지 최근 줄줄이 이것들을 교체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가전제품도 수명이란 게 있다. 수명이 있는 고가의 가전을 왜 아무렇지 않게 ‘봄맞이’를 내세워 팔았을까? 


카피를 쓸 때 공감을 우선시하는 나는 강연할 때도 수강생들에게 ‘자신이 어떤 카피에 공감을 했는지, 어떤 카피를 보고 마음이 움직였었는지’를 잘 생각해 보라고 한다. 아마도 ‘봄맞이 가전 교체’라는 타이틀에 바꿀 마음이 생기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그렇지 않으면서 왜 고객들은 그런 쉬운, 별 거 아닌 그런 이유로 제품을 구매하길 바라는가? 


의식하지 않고 써지는 대로 쓰는 카피 중에 몇 가지가 있다. 사실 얼마 전에 모기업에서 짧은 기간 동안 카피 검수를 맡아 진행했는데 거기서도 내가 지적하고 싶은 카피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었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여름 단골 멘트, 선글라스나 모자, 선크림 등에 활용) 

-OO 고민은 이제 그만! 

-OO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OOO의 모든 것 

-여름을 부탁해 or 여름아 부탁해 


한때는 너무 신선했다. 노래 제목이나 드라마 타이틀을 빌려 쓰기 하는 건 두루두루 잘 쓰는 방법 중 하나다. 지금도 여전히 어떤 드라마나 영화 제목이 히트를 치면 줄줄이 활용한다. 나도 늘 창조하지 말고 편집하라고 강의에서 줄곧 말한다. 하지만 너무 오래됐고 뻔한 멘트는 “이제 그만!” 써야할 때가 됐다. 앞서 몇 개의 예로 든 문구들은 세일즈 카피를 쓰는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버렸다. 이런 건 이제 뜯어낼 필요가 있다. 도저히 이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을 땐 뉘앙스만 살리고 단어를 바꿔주는 방법이 있다. 가령 ‘태양을 피하는 방법’으로 선글라스를 판매하는 카피를 쓰고 싶다면 ‘햇빛을 거부하는 멋진 노하우’라고 바꿔보면 어떨까? 의미는 같지만 ‘태앙을 피하는 방법’처럼 식상하진 않다. 오히려 담백하다. 


이젠 여름한테 그만 부탁하자. 카피를 쓰는 우리의 자세부터 바꾸자. 늘 쓰던 대로 쓰고 있진 않은지 한 번 더 고민하자. 고객들에게 가전 교체를 요구하고 싶다면 내가 언제 가전제품을 바꿨었는지를 떠올려보자. 나처럼 10년 쓴 세탁기, 더는 얼음이 얼지 않는 냉동고, 먼지를 뱉어내는 청소기,처럼 실제로 고객들이 가전 제품을 바꿀 때 쯤에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교체를 이끌어내는 게 낫다.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제품은 그냥 사이트를 둘러보다가 사기보단 사려고 마음을 먹고 보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좀 더 가닿을 수 있는 카피는 문제점을 건드려주고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는 카피여야 한다. 잘 쓴 카피는 고객의 문제점을 잘 찾아낸 카피다. 거기서 디테일이 생기고 그런 사소한 멘트에 고객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지갑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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