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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뫼 May 09. 2023

드립커피와 함께하는 진공의 시간

내 방 책상 여행기 ④ ‘Drip Coffee Map’



지난해 가을, 인터넷 쇼핑으로 드립 커피를 처음 사 봤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고 싶었는데 마음에 드는 건 비싸고(이사 직후라 금전적 출혈이 너무 커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적당한 걸로 사자니 성에 안 찰 것 같아 고른 차선책이었다. 날씨도 슬슬 쌀쌀해지고 있으니 한 잔, 한 잔 내려 먹는 맛도 있을 것 같았다.


한 브랜드의 24개짜리 드립 백을 샀다. 여덟 종류의 원두가 3개씩 들어 있었다. 한 종류의 원두만 먹으면 지겨울 것 같기도 했고 제품의 이름이 문학적(?)으로 다가와 왠지 모르게 끌렸다. ‘깊은 밤의 산책’ ‘뜻밖의 황홀함’ ‘일상의 여유’ 같은 식이었다. 인터넷 쇼핑몰 상세 페이지에는 원산지별 원두의 특징과 단맛과 쓴맛 등의 정보가 적혀 있었는데, 커피를 마실 때마다 그걸 찾아보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주로 위에서 얘기한 제품명과 드립백 봉지 그림을 보고 그때그때 끌리는 걸 선택해 마셨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아침에는 주로 안데스산맥 고산지대에서 노동을 하는 농부와 당나귀가 그려진 ‘산뜻한 아침’(콜롬비아 수프리모)을 마셨고, 말이 통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만년설이 내려앉은 산이 그려진 ‘은빛 정상의 위로’(탄자니아 AA)를 마셨다. 골라 마시는 재미 덕분에 지겹지 않게 24개를 다 마시고, 같은 브랜드의 32개짜리 드립백을 또 샀다. 32개짜리는 16종의 원두가 2개씩 들어 있었다. ‘영원한 우정’ ‘원시의 편안함’ ‘핑크빛 입맞춤’ 등 추가된 8종의 제품명 또한 흥미로웠다. 그리고 24개짜리에는 없던 엽서 크기의 ‘Drip Coffee Map’ 카드가 들어 있었다.


4면으로 구분된 좌표평면 위에는 각 원두가 어떤 맛을 내는지 제품명과 봉지의 그림이 올라가 있었다. x축 좌우에는 각각 ‘단맛’과 ‘바디’가, y축 위아래에는 ‘신맛’ ‘쓴맛’이 쓰여 있었다. 카드가 있으니 쇼핑몰 상세 페이지에 들어가지 않고도 어떤 맛과 향의 원두인지 편하게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작년 연말부터 올봄이 오기 전까지, 남편과 아이가 모두 나가고 나면 나는 주전자에 물부터 끓였다. 커피의 맛을 떠나서, 혼자 조용히 따뜻한 드립백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게 지난겨울 나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아니, 행복이라고 말하기는 거창하고,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진공 상태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 '진공'의 상태가 꼭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때로는 새로 사귄 이웃, 오랜 친구들이 집에 방문했을 때도 그 커피를 함께 마셨다. 32개짜리에는 디카페인인 ‘부담 없는 밤’도 포함돼 있어 카페인을 꺼리는 사람도 함께 마실 수 있어 좋았다.



지난 겨울 평일 오전, 눈 내리는 창문을 보며



32개 드립백을 다 마시고 2월 말부터 한동안은 되는 대로 커피를 마셨다. 한 잔도 안 마시는 날도 있었고, 저가 매장 커피를 사 마시기도 했고, 인터넷으로 플라스틱 병이나 팩에 들어 있는 대용량 커피를 사놓고 마시기도 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고정적인 커피가 없는 게 이렇게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우연히도 그 3, 4월이 나는 조금 힘들었다. 무기력함에 빠져나오지 못한 날이 다반사였고 그동안 몰랐던 내 마음의 민낯을 발견해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글쓰기를 아예 놓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드문드문이지만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날에는 블로그에 일기를 썼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때 썼던 글 하나가 시발점이 되어 지인들과 프로젝트를 꾸리게 됐다. 그 프로젝트의 끝은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 좋다. 그일 덕분에 글쓰기도 계속해 보자고 마음먹게 되고,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는 느낌이 든다.


지난주 금요일, 그 문학적(?)인 드립백 커피를 다시 구매했다. 정말 문득 ‘그 커피를 다시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찾아왔고 망설임 없이 결제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이므로 24개짜리로 샀다. 하지만 연휴로 시작된 5월은 아직 어수선하다. 새로 시작하는 주도 당분간 어수선할 예정이다. 그 어수선함이 끝나면 나는 다시 그때의 진공을 느낄 수 있을까. 긴 연휴 끝에는 왠지 ‘천개의 언덕’이 어울릴 것 같다.



(23.05.0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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