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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지 Jul 03. 2023

유리천장지수, 스웨덴이 1위인 이유는?


태권도 진흥재단에서 주관하는 스웨덴 태권도 교실 담당자로 일할 때였다. 재단 과장님께서 사업 담당자와 태권도 지도자는 "성희롱 방지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며 예방지침이 작성된 홈페이지를 보내주셨다. 음.. 성희롱 방지 교육이라.. 한국의 지침을 스웨덴 사회에 적용하라는 건데 이게 과연 괜찮을까 싶었다. 어떻게 설명드릴지 생각하다 과장님께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일광욕을 하다가 소매치기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스웨덴 경찰


나는 맨손으로 소매치기를 제압한 스웨덴 여성의 사진을 보냈다. 이미 한국에서도 기사가 나왔을 정도로 화제가 된 사진이다. 공원에서 일광욕을 하다가 소매치기를 발견하고서 비키니 차림으로 쫒아가 범인을 체포한 스웨덴 여경. 내가 이 사진을 보내게 된 이유는 스웨덴 여자들이 좀 강력한(?) 존재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사실 스웨덴 여자들 모두가 저 여경처럼 근육질이고 무술로 단련되어 있어 무장강도를 맨손으로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7년 간 살면서 만나고 경험한 스웨덴 여자들은 사진 속 경찰처럼 강인하고 주체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여자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지 못할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기 드물었다. 성차별 방지를 위한 사회적 배려를 원하기 보다 당당하게 자기 힘으로 능력을 키워 맞서는 쪽이 스웨들 여자들이랄까? 그러니 적어도 여기서 여성을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여 성희록 교육을 받게 하는 건 스웨덴 남녀 모두가 코웃음 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OECD회원국의 유리천장지수를 보여주는 지표. 아이러니하게도 꼴등의 나라(한국)에서 온 내가 1등의 나라(스웨덴)에서 살고 있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남녀 차별에 격차가 없는 나라이다. 이코노미스트가 2013년부터 OECD회원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유리천장지수를 집계한 결과 스웨덴은 작년과 재작년 모두 1위를 기록하였다. 이는 여성 국회의원 비율, 성별 임금 격차, 기업 내 여성 임원 비율,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 비율 등 10가지 항목을 토대로 산출된 결과이다.


재작년에는 스웨덴에서 첫 여성 총리로 마그달레나 안델손(Magdalena Andersson)이 부임했다. 유리천장 지수가 세계 1위인 나라 치고는 좀 늦지 않은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정부 관료들을 다 뜯어보면 얘기가 다르다. 현재 스웨덴 정부는 22명의 장관을 두고 있는데 이 중 11명이 여성이다. 여기서 총리까지 포함한다면 총 12명의 여성이 정부 핵심 관료이니 50% 이상이 여성 정치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Säpo(스웨덴 보안국) 국장, 대기업 임원 등 조직 중간관리자에 대부분 여성들이 포진되어 있다. 많은 스웨덴 여성들이 사회에서 굵직한 자리를 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웨덴 유리 지붕은 다 뚫린 것일까? 그렇다고 볼 수도 없는 게 스웨덴 유리천장지수도 100점 만점에 84점을 기록했다. 그러니 아직도 보이지 않는 성차별은 여전히 스웨덴에서도 존재할 것이다. 뭐 적어도 여타 다른 나라보다는 천장에 더 금이 가있겠지만. 


스웨덴 드라마 보누스파밀리앤(Bonusfamiljen) 임신 초기에 목재를 나르는 여자 주인공 리사
남편이 "너는 임신중이니 내가 짐을 들게" 말하자 "아니 내가 들게" 말하는 리사


스웨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SFI(이민자 스웨덴어 코스) 쉬는 시간에 전등을 갈아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꽤 무겁고 큰 전등을 여자 선생님이 혼자서 교체하려고 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리아 남학생 두 명이 다가와 자신들이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 선생님을 도우려는 남학생들이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괜찮다고 말하며 남학생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다. 나도 "음 남자들이 하면 빨리 끝낼 수 있을 텐데.." 생각하던 찰나에 그 남학생들이 "우리가 쉽게 할 수 있어요. 이런 건 남자들이 하는 거예요"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전등을 향해 올린 고개와 높이 뻗은 손을 내리고서 남학생들을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Nej!! (아니)
스웨덴에서 그렇게 말하면 안돼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던 선생님. 결국 그녀가 전구 가는 모습을 학생들 모두가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막힘없이 전구를 갈아 끼우고 발을 딛기 위해 올라간 의자까지 말끔히 정리한 뒤에 교실을 빠져나갔다. 사실 지켜보는 동안 여자가 전등을 만지는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꽤 멋져 보이기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 스웨덴어 선생님이 남성성이 강한 여성인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남이 할 땐 멋져 보였으나 막상 나에게 닥치니 혼란스러웠다. 우리 부부에게 차가 없던 시절 짐을 나눠서 들어야 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남편은 내게 똑같이 짐을 배분해주려고 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나는 내가 여자인데 남자인 네가 더 들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자 남편은 "아니 수지가 들 수 있는데 왜? 우리 똑같이 들면 돼"라고 말했다. 그 말이 너무 치사하고 어이없어서 " 여보가 더 힘이 세잖아! 남자니까 더 많이 들어야지" 말하니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헛웃음을 쳤다. 자기만 물건을 다 들고 나만 빈손으로 간다면 내가 병이 있거나 혹은 장애가 있는 줄 알 거란다. 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신박한 대답이다. 내가 장애가 있다니???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싶어 더 따져들자 "네가 충분히 들 수 있잖아"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어떤 봉다리를 누가 더 드냐 마냐를 놓고 살벌하게 다투다 결국 나는 심통이 가득 난 채로 봉지 하나를 들고서 남편과 멀리 떨어져서 걸었다. 당시에 내 마음은 야박한 놈, 나를 무거운 거 들게 하고 이 고생시키려고 스웨덴까지 데려왔나 싶었지만 7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짐을 들고 다닌다. 


나에게 "당신은 강한 사람"이라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해주며 세뇌를 시킨 효과도 있지만, 늘 남편에게 기대거나 무언가를 시키려고 들때마다 늘 나 자신이 약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약해지고 싶지도 않았고 남편이 내가 강하다 말해주는 그 말이 좋기도 했다. 남녀의 일을 따로 구분 짓지 않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나만 몸 사릴 수없기에 하지 않던 일을 시작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예를 들어 남자가 짐을 드는 게 여자를 보호하고 또 배려와 매너로 해석될 수 있지만, 다른 의미로 여자는 늘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적어도 스웨덴에서는 그런 남녀 간의 차이를 두고 싶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고 말이다. 


스웨덴의 세계 여성파워가 1위인 이유를 생각해 보면 남녀가 생물학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특정 성(性)이 할 수 있는 일과 능력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빠가 갓난아기를 돌보며 집에서 육아하고 엄마는 출산 후 곧장 사회로 복귀하여 경제적인 책임을 진다. 여자가 덤프트럭을 몰고 남자가 유치원 교사를 하는 것도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여자가 전등을 갈고 남자가 요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게 스웨덴에서는 놀라운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아닌 "뭐든 구분 없이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함께 존재할 뿐이다.


글을 적다 보니 스웨덴 여자들은 강하고 주체적이고 자주적이고 멋진 건 다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이 들다가도 스웨덴 여성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스웨덴 남사친의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오랜 기간 동거도 하고 짧게 데이트도 하면서 적지 않은 스웨덴 여자들을 만난 친구에게 나는 왜 스웨덴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가 웃픈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야 요리하고 청소하고 내가 모든 걸 다 해야 하니까 그렇지. 너무 강해도 별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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