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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래 Feb 05. 2021

[달래에세이 3] 설거지라는 위로


여느 때처럼 부산스럽게 모든 일을 마치고 둘째, 셋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퇴근 및 육아 출근을 한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수북이 쌓인 빨랫감과 설거지. 아니 분명, 아침에도 한 것 같은데 역시나 뒤돌아서면 쌓이는 것이 집안일 아니겠는가...

아이들이 설거지-빨랫감과 같은 레벨로 내 어깨를 두드릴 때면 설거지쯤은 skip 버튼을 누르고 싶은 심정이다. 


반복되는 일, 끝나지 않는 일, 지루하고 귀찮은 일, 해도 해도 티 안 나는 효용성 없는 일, 안 그래도 시간을 먹는 집안일은 저런 부정적인 말들로 엄마의 시간뿐 아니라 마음까지 잠식한다. 그래서 참으로 오랜 시간 집안일의 무용한 느낌에서 허우적대다 많이 울었다. 억울함과 서운함으로 무장한 '자기 연민'을 내 인생 비석에 새겨 넣었다. 


하지만 며칠 전, 친한 언니가 이사를 가게 되어 사용하던 식기세척기가 갈 곳을 잃게 되었다고 내게 친히 귀한 잇템을 양도하겠다고 했다. 언니는 분명 있으면 훨씬 낫다고 데려갈 것을 권한다고 했지만, 순간 내게 어떤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설거지를 향한 복잡한 심경 말이다. 결국 배수관 구멍을 뚫어야 하는 문제로 양도하는데 실패했고 나는 다시 안도감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해야 하는 이 설거지가 내게 다른 의미로도 자리하고 있음을 알았다. 



사실 아이들과 놀아주다 지쳐 설거지를 향해 도망치는 일이 많다. 그렇게 설거지에 몰두하다 보면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기도 하고 단단했던 마음은 조금 풀어지고 가라앉는다. 심지어 나만의 룰이 생겨 친정엄마나 남편이 가끔 설거지를 할 때면 자유자재로 제 자리가 아닌 곳에서 웃고 있는 식기들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물론 내가 설거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서둘러 집에 올 정도는 아니지만 설거지하는 그 자리가 내 이상한 쉼터가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극히 평범한 하루를 살다가 온갖 심사가 꼬여 주체하지 못할 때면 집안의 모든 식기가 나와있는 수북이 쌓인 저녁시간이 끝난 싱크대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선다. 내 어깨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한 마파가 '설거지는 내가 할게'라고 선심을 쓰려고 하면 재빨리 거절하고 온전히 설거지 타임을 수행한다. (여보는 아이들과 놀아야지~)  그렇게 온갖 심사가 꼬이다가도 설거지를 끝낼 즈음에는 꼬인 심사들이 정리된 그릇처럼 조금은 정렬되어 있다. 




그렇게 계속해서 설거지, 요리, 청소하는 시간을 내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요긴하게 써왔던 건 나만 몰랐던 것 같다. 조용히 제 자리를 찾은 빨랫감과 식기들, 그리고 배불리 먹은 아이들의 표정은 다 알고 있다는 듯 행복감을 분출하고 있는데...


평범한 어느 날의 식탁 그리고 간식에 진심인 막내



처음에는 설거지의 소중함이 소란스러운 육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거지 타임은 그릇이 씻겨나가고 내 가시들이 씻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뛰어다니는 소리, 경쾌하게 싸우는 소리, 내 인생의 소중한 소리들이 어우러지는 귀중한 시간임을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닫는다. 반복되고 평범한 설거지의 순간들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행복한 순간임을. 이렇듯, 설거지는 내게 잠시나마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물리적인 위로와 동시에 고차원적인 위로를 약속하고 있다. 일종의 타임머신 같은?


나는 내 등 뒤에서 나는 소리들이 변화할 때마다(소란스러움에서 침묵으로) 몰려올 ‘그리움’에 대비하기 위해 주방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을 호흡으로 삼고 그저 설거지에 몰두할 것이다. 여전히 나만의 설거지 룰을 성취하며, 성실하게,


하지만 몰려올 그리움에 완벽하게 대비하지는 못하겠지. 그땐 그저 정리된 그릇을 잠시 바라보고 깔끔하게 돌아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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