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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래 Mar 09. 2021

[달래에세이 4] 평범한 날

   




나와 나누는 이 대화가
나를 가린 안개를
조금씩 걷어주지 않을까




산책 하다가 만난 목련 봉오리 (조천리)





아무 일도 없는 날.

그저 여느 때처럼 평범한 날.

심지어 잠시 걸었던 길가에 목련 봉오리가 이제 막 입을 벌려 봄을 맞이했던 날.

그랬던 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날 에워쌌다.

어떠한 색깔도 띄지 않은 채 막연히 뿌연 안개의 모양으로 나를 뿌연 물속에 풍덩 던져 놓았다.

이상하게 우울한 이 감정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아이들이 신나게 춤추고 웃으면 따라 웃다가도 이내 나를 삼킨 그 감정에 모든 예쁜 것들이 다 사그라들었다. 오늘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또 바쁜 하루를 통과하면 다시 아이들과 하하하 웃으며 안개 모양 감정 따윈 생각도 안 나겠지.



수일이 지나 목련이 모든 것을 피워낸 날, 그것은 더욱 뿌옇게 나를 집어삼켰다.

그저 괜찮아지겠지 하고 마파에게 나의 감정을 바디랭귀지로 설명했는데



나도 그럴 때가 있어.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야.


이유가 있을 거야...

그 말을 곱씹을 때마다 눈물이 나는 걸 보니 이유라는 게 있는 게 분명했다.

엄마들에게 갱년기가 찾아올 때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내가 지나치게 감상적이어서 이런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우울의 늪에서 나는 조금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예전보다 새로운 관계가 이젠 더욱 두렵고 웃을 일도 점점 사라져간다.

사업을 하며 여러 변수로 인해 더욱 단단해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 고통의 깊이를 체험한 순간, 다시 다가올지도 모르는 어려움 앞에서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단단한 어른이 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이란걸...

삶의 무게를 온통 혼자 다 짊어지고 어릴 때부터 독립적으로 다 해내버리려고 했던 무서운 습관이 늘 샘솟지만, 결국 다 할 수 없는 어린아이가 또 우울의 늪으로 빠진다.




나는 다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일터에서는 손님을 받고, 대수롭지 않은 일들에 감정이 상하고, 금세 풀리고, 다시 평범한 날들을 살아가겠지.

하지만 마음이 텅 빈 채로 벚꽃이 내 눈앞에서 떨어지면 다시 또 눈물을 머금고 시간을 세어보다 또 돌아서서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또 말간 얼굴로 웃고 있겠지.


그냥 그렇게 텅 빈 채로 흘러가 버리는 시간이 너무 속절없을 것 같아 그냥 단단하거나, 말랑하거나, 흔들리거나, 상관없이  는 어디에 있고, 무얼 좋아하며 싫어하는지. 벚꽃잎 세듯이 세어보기로 했다.



나를 웃게하는 것들, 행복하게 하는 것들

우선 생각났던 건,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남편.
섬세하고 유쾌한 남편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건 내 인생 얻은 최고의 복.
그리고 생각이 비슷하고 취향이 비슷한 이들의 글을 읽는 것.
잘 써 내려간 따뜻하고 슬픈 이야기가 담긴 소설.
제주를 담은 나의 사진들.
그리고 태국 음식, 보기만 해도 나를 설레게 하는 연어.
지금은 다들 너무 멀리 있지만 몇 안 되는 소중한 언니, 동생들.
그들에게 받은 편지.
내 필통, 노트, 나의 무딘 칼, 녹이 슨 식기건조대, 핸드크림.
어디엔가 처박혀 주인을 찾는 필름 카메라 니콘 FM2,
그리고 내가 준 것보다 열 배는 더 돌려주는 우리 둘째 유솔이..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그 감정을 상기하며 하나하나 나열해보니 생각보다 가짓수가 많음에 '우울의 늪'이고 뭐고 너무 감상에 빠져 있었나 부끄러워졌다. 내 안에 어떤 색이 어떠한 모양이 자리하고 있는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떠한 필터가 있는지 미술작품 감상하듯 들여다보는 그런 시간..


나를 소홀히 하지 말고, 지나치게 절제하며 나를 가두는 느낌으로 살지 말고, 우리 아이들을 기다려주듯 나도 기다려주고 바라보아주고 나만의 기쁨을 잊지 말고 간직하기를 격려해본다. 나와 나누는 이 대화가 나를 가린 안개를 조금씩 걷어주지 않을까.


그냥 조금 편하고, 쿨하게 좋아하는 것들로만 생각해 보는 것. 어려움 따윈 고이 접어 주머니에 잠시 넣어두고 행복을 음미하는 시간이 내게 필요했다.







그래야 다가올 벚꽃의 계절이 온전히 나의 봄으로 충만해지겠지.

다시 시작되는 평범한 날들이 결국 찬란한 날임을.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우리동네 유채꽃




#에세이 #평범한날 #제주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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