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행우주의 나는 시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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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는 팽창하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은 우리의 우주를 상상해보노라면, 정말 평행우주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든다. 멀티버스(평행우주) 세계관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에서처럼. 선택하지 않은 길을 떠난 또 다른 나의 세계를 마주친 에블린(양자경)의 눈빛으로, 오늘 나는 내 안에서 {멈추어버린 마음의 목록}을 꺼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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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란 동시에 존재하는 두 개의 동일한 우주를 의미한다. 만약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어떤 한 세계에서의 나는 시인이 되었을 거라고 그 모습을 가늠해본다. 그것은 내가 가지 않은 삶, 선택하지 않은 길이다. 시를 쓰는 것은 아주 오래전 내가 멈춘 일이고,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은 내게 ‘멈추어버린 마음’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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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선택하지 않은(혹은 못한) 이유는 순전히 내게 시인으로서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어국문학과 새내기 시절, 가을마다 열리는 [국문인의 밤] 행사를 위해 국문과 학생들은 저마다 시를 창작해 제출했다. 선정된 시는 시화 액자로 제작되어 전시된다고 했다. 국문학도가 되었다는 자부심을 품은 스무 살의 나 역시 제법 열심히 시를 써서 냈다. 돌아온 답은 처참했다. 내가 쓴 시가 프린트된 A4 용지 위에 커다랗게 X자 표시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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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되지 않은 모든 시에 그런 표시가 있지는 않았는데, 유독 내 시 위에는 커다란 표식이 남았다. “이런 건 시가 아니지!” 교수님이 그렇게 말하며 가위표를 그렸다고, 학우들의 모든 시를 들고 연구실을 찾아갔던 선배가 상황을 (굳이) 재연했다. 그날 이후 나는 시라는 것은 단 한 자도 쓰지 않았다. 대신 교수님을 조금 미워했다. “시가 도대체 뭐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알 수 없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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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중에는 바로 시인이 될 수 있을 만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친구도 있었다. 함께 활동했던 학회에서 그가 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띵. 정말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시는 못 쓸 거야. 그가 쓴 시가 너무 대단하고 높은 곳에 있어서, 나는 시 따위 더는 안 쓰길 잘했다고 납득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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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하는 동안 그 친구는 내게 가위표를 주었던 그 교수님으로부터 “원한다면 언제든 등단시켜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친구는 시인이 되지 않았다. 그는 한사코 시인의 길을 거절했다. 조용히 졸업했고 삼성에 입사했다. 나는 배가 아팠다. 그가 손꼽히는 대기업에 다녀서가 아니라,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재능을 갖고도 시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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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뭔데? 시가 뭐기에? 나는 X표를 받은 날 이후로 끝없이 되물었다. 어쩌면 나는 그 어떤 시인보다도 ‘시란 무엇인가’를 많이 묻고 헤맸을 것이다. 여전히 정답은 찾지 못했지만, 십여 년이 지나고서야 다시 시를 쓸 수 있었다. 오직 시를 써야만 모든 게 괜찮아질 듯 여겨질 만큼 고통에 찬 날이었다. 가슴에 그려진 X 너머의 말을 찾기 위해 나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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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어느 우주의 나는 시인이 된다. 내가 가지 못했던 길, 용감하게도 그 길을 걸어가는 내가 존재한다. 평행우주를 믿으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Everything).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다(Everywhere). 그것도 동시에(All at o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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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된 세계의 나는 어쩌면 이 세계의 나를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를 가엽게 여겨 구원해주려고 몰래 이 세계로 건너와, 내 가슴속 {멈추어버린 마음의 목록}을 슬쩍 가지고 도망쳤는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