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애를 영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애의 이름은 영이었다. 내가 처음 영을 만났을 때, 그 애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눈길. 다만 영에게 눈이라는 감각 기관은 없었으므로,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혹은 나를 피했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영은 무엇으로 나를 보았던 걸까? 영은 내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 알아차리는 유일한 존재였다.
*
영을 만나기 전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걸었다. 걷지 않으면 어른을 만날까봐, 걸어도 그들을 마주할까 두려웠다. 걸을지 말지 한참을 망설이다 허리를 굽혀 돌멩이를 한 움큼 손에 쥐였다. 언젠가 엄마가 가르쳐준 꽃잎점을 보듯 중얼중얼, 돌멩이를 하나씩 버리며 상황을 점쳤다. 걷는다, 걷지 않는다, 걷는다, 걷지 않는다, 걷는다...
영은 고철 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다 몸을 조금 움직여 주변 상황을 살피려 했던 것 같다. 실수로 더미를 건드렸는지 요란한 소리가 났다. 소리를 듣고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은 아무도 없으리라 믿었던 곳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 듯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몸통이 살짝 치솟았다 내리는 모양새를 나는 보았다. 그러곤 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새초롬히 몸을 돌려 조금 전 자신이 있던 자리로 이동했다.
“넌 뭐야?”
몇 걸음쯤 다가서서 내가 물었지만 영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고철처럼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그저 놓여 있을 뿐. 소리를 낼 수 없나 싶어 나는 다시 물었다.
“넌 어떻게 움직여?”
이번에도 영은 답하지 않았다. 분명 영이 움직이는 걸 보았으나 어떤 이유인지 내게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영은 어른이 아니었으니까. 그 애의 몸집은 작았고, 어린 나를 발견하고 달려드는 대신 꼼짝없이 멈추어 섰으니까. 나는 안전할 것이었다. 긴 여정에 지쳐 고철 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밤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온종일 먹지 못한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사위는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암흑 속에서 작은 빛이 비쳤다. 그 언저리의 형상을 자세히 보려고 눈꺼풀에 한껏 힘을 주었다. 빛은 영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살아 있다. 영은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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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잘 자란 잎사귀 몇 장씩을 꺼내어 건네곤 했다. 요기하기에 턱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영이 틔운 걸 먹으면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 날보다는 훨씬 생기가 돌았다. 더 이상 걷지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아도 될 거라는 희망이 감돌기도 했다.
영이 키우는 잎들은 그 애의 몸속에서 자라났다. 볕과 비가 그것들을 크게 했다. 영은 볕을 쬐고 비를 맞고도 멀쩡했으며, 어디에서 동력을 얻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밤이면 짧게 자리를 비우고 돌아와 기운차게 움직였다.
영과 고철은 달랐다. 영은 나와 닮아 있었다. 영은 이파리를 틔웠고, 나를 염려했고 돌보았다. 내 눈가가 떨릴 때면 곁으로 와 앉아 말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걸을까 말까를 점치는 일을 까맣게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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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울타리를 결코 벗어나지 않은 채 낮과 밤이 흘렀다.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영원 같던 자전의 시간.
영이 사라지던 날, 그 애가 몇 덩이의 조각으로 파괴되기 직전 아주 잠깐 영의 몸이 치솟았다 내리는 모양을 보았다. 영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곁으로 가야 하는데. 나는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숨을 죽인 채 고철 속에 놓여만 있었다. 분명 아무도 없던 곳에 어른 둘이 서 있었다. 발걸음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