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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희 Jan 29. 2019

근시안으로도 잘 살아가려면

리프레시가 끝나간다, 허허 거참

아이들이 개학이어서 아주 오랜만에 집에 혼자 있다. 일 때문에 재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여유. 햇살과 소파와 커피와 책과 고요함, 좋아하는 것들이 다 있다. 이 좋은 하루 동안 뭘 하지 아침부터 넷플릭스를 뒤지다 영화관을 알아보다, 낼모레면 끝나는 리프레시 휴가를 마감하는 뭔가를 남겨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별달리 영감을 얻거나, 성찰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의무감 같은 게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냥 잘 놀고 쉬고 가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 잘 놀거나 열심히 놀면 돌아가서 힘들까봐(?) 가급적 느긋하게 지내려 노력하기도.
그 와중에 내 삶에 대한 성찰을 하기도 했으니, 한없이 정적인 내 삶을 이만큼이나마 다이내믹하게 만들어준 것은 ‘예습하지 않는 습관’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모든 시험에 벼락치기로 일관하던 습성은 모든 일을 몰아쳐서 하는(=닥쳐야 하는) 패턴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불필요한 소란이 생겨나곤 한다. 그 소란조차 최소화하는 데에서 이상한 희열을 찾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걸 조금 세게 깨달음. 미술관 투어를 한다고 했으면 최소한 휴관 일정 정도는 알아봐야 하는데 내내 안 하다가 하루 전날 사이트 들어가서 확인하고 멘붕이었다. 그러니까 아예 준비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할 건데 그걸 너무너무 닥쳐서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안 하고 있다가 막상 모른 채 가려니 그때서야 불안했던 거지ㅡㅡ 데시마와 이우환 미술관과 지추미술관은 그렇게 멀어져갔다.
문제는 못 간다는 걸 알고 나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속상해했다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가봐야 할 데가 얼마나 많은데 여길 또 오게 될까 싶어 한숨만 푹푹 쉬다가 급기야 찔끔 눈물이 나려 했다. 세상에서 제일 꼴사납게 여기는 짓(징징거림)을 내가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너 일하러 온 거 아니다, 깃발 꽂으러 온 거 아니다, 너답지 않게 왜 욕심을 내니.


그러다 며칠 만에 내린 한탄조 결론이, 느긋하게 다니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영락없는 관광객이었구나, 였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거나 으레 가야 한다는 곳들을 찾아다니고, 그곳에서 먹어줘야 한다고 한 것들을 먹고 있더만 ㅎㅎ (뉴욕 초행길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가지 않았던 뀰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지 비로소 실감했다.) 나이에 비해 다닌 곳이 너무 없다 보니 ‘기본적으로 가봐야 하는 그곳들’은 다녀줘야 하지 않나 하는 조바심이 들었던 모양이다. 고3 돼서 벼락치기로 대입 준비를 하던 그 시절하고 다를 게 하나 없었다. 생활하듯 느긋한 여행이 멋있어 보여서 따라 하고 싶은데, 처음 왔으니 어디어디는 가봐야 할 것 같고 하는 내적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
그러다 또 생각해보니, 이것이 어찌 여행뿐이랴 싶다. 어쩌면 내 일상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이나 관심사를 익히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나 편한 대로 밀어붙이지도 못하겠는, 끼인 느낌이 들 때가 간혹 있다. 여행자든 관광객이든 어느 쪽도 후진 게 아니고, 어떤 취향이든 관심사든 나름의 존중 포인트가 있는데, 그냥 내가 내게 맞게 정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고 혼자 징징대고 있었던 거다.




빛과 전자는 왜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는 것일까? 이 두 성질은 물리적으로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무선 통신할 때 빛은 파동으로 행동하지만, 광전효과실험에서 빛은 입자로 행동한다. 이 두 실험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둘 중에 하나의 실험을 하면 빛은 입자와 파동,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마치 남자냐고 물으면 남자가 되고 여자냐고 물으면 여자가 되는 것과 같다. 전자도 마찬가지다. 사실 양성자, 중성자 등 물질을 이루는 모든 기본 입자뿐 아니라,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원자도 전자와 같은 이중성을 갖는다. 이중성은 자연의 본질인 것 같다. 여기서는 질문이 존재를 결정한다. 보어는 이중성의 이런 특성을 ‘상보성’이라 불렀다.



김상욱 교수는 <떨림과 울림>에서 “상보성은 정반합의 철학과도 다르다”고 말한다. “상보성은 정과 반이 공존한다고 말할 뿐이다. 둘이 융합하여 새로운 합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실험을 하면 대립물 가운데 하나만 옳다.”
학생 때 어설픈 머리로 정반합을 배운 이후, 그리고 일하면서 툭하면 나오는 ‘시너지 효과’가 머리에 박힌 이후, 나아가 통섭적 사고가 중요하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 이후, 이것과 저것을 아울러 한층 나아가는 모종의 결실을 거두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이 구절을 읽고 어느 한 부분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고, 그것이 틀린 것도 아니고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만큼 유연한 존재다. 못 가본 그곳에 또 갈 수도 있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중요한 건 내가 그 순간 얼마나 충일한가 하는 것이다.

울기 직전의 마음이 풀어진 건 나오시마의 한 우동집에서였다. 뜨뜻하고 탱글한 것이 들어가니 꼬였던 속이 조금씩 풀어졌다. 앞쪽에 앉은 동네 아이는 낯선 나를 힐끔힐끔 보면서도 어린 동생의 식사를 챙겨주고 저도 단정히 젓가락질을 했다. (나는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에 유난스럽게 감격하는 유형이다.) 아이 엄마는 바쁜 주인을 거들어 자리를 치워주고. 여행이 느긋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좋은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나오고 서두르지 않게 된 게. 사소한 한 끼 식사 덕분에, 좁은 공간을 꽉 채운 배려의 기운 덕분에. 그러니 사소한 즐거움을 크게 느끼고, 사소한 포인트에 최선을 다하자. 예습이 안 되면 실전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근시안이라면 지금 내 눈 앞의 결정에 공을 더 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조금씩 방향을 만들어가는 거다.




만약 여행 중에 그림을 그린다면 이곳일 거라 생각하며  찍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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