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트렌드 노트》 이야기
난 루틴이 강한 편이야.
꽤 오래전부터 나를 보며 느낀 것이고, 몇 년 전부터 사람들에게 말해온 것이다.
정해진 일상의 패턴을 잘 지키고, 힘들거나 즐겁거나 업앤다운 없이 대체로 유지하는 편이다.
이런 내가 스스로 재미없다고 느끼곤 했다. 새로움도 없고 짜릿함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되게 부지런한 것도 아니다. 루틴의 영역에 들어온 것에만 성실하다. 수아 서윤이 애깃적에는 천기저귀를 매일같이 삶아 빠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 뒤에는 어떤 손빨래도 귀찮아하고 안 하고자 한다. 퇴근하고 이유식 만드는 건 당연했지만 그 후로는 밥 외에 어떤 특식도 잘 안 만든다.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대차게 하는 게 아니라 바닥 중심이다. 회사일에도 일 벌이는 게 기본속성인 기획보다는 벌어진 일을 정리하는 편집이 더 맞는다. 프로세스도 비교적 안정돼 있고. 여행도 많이 안 갔고, 대체로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재미가 없지. 남들 보기에 크리에이티브한 삶도 전혀 아니고.
이걸 혼자만 생각하고 있다가, 몇 년 전부터 <나는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기엔 밋밋한 사람입니다>라는 뜻으로 주변에 말하기 시작했다. 난 루틴이 강하다고. 그러니까 내게 루틴은 창의성을 해치는 게으른 관습 같은 거였다.
그러다 루틴이 뭐 어때서,로 마음이 돌아선 건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았다. 남들 눈에 흥미롭건 말건, 루틴을 지켜왔기 때문에 크고 작은 위기를 이겨내고 계속 일할 수 있었다는 걸 받아들이면서부터다. 많지 않은 내 에너지를 반드시 필요한 곳에 배분하며 잘 관리해왔기에 더러 지칠지언정 뻗거나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이번, 《2021 트렌드 노트》에 트렌디함과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루틴’이 주요 키워드로 등장했다.
빅데이터가 묘사한 우리 생활은, 코로나19 이전부터 혼자만의 시공간을 중시했고(《2020 트렌드 노트》 주제), 코로나19로 그 속도가 엄청 빨라졌다. ‘집’은 더 중요해졌고 ‘나’도 더 중요해졌다. 양상도 더 진화되었다. 예전에는 무작정 ‘나는 특별하다’고 느꼈다면 지금은 바이러스 앞에 지극히 평범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별함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그만두지 않는다. 예전에는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 인증샷으로 특별함을 뽐냈다면 이제는 일상 그 자체인 홈트레이닝으로 끈기를 보여준다. 여행사진이나 명품 언박싱에 남들이 부러워해서 내가 특별해지는 게 아니라, 소소하지만 눈에 보이는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스스로 만족하고 특별해진다. 육아맘의 미라클모닝, 40대의 바디프로필, 직장인의 유튜브 도전, 나이키런클럽… 바야흐로 셀럽이 특별한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특별해지는 시대다. 이제 트렌드를 보려면 셀럽이 아니라 직장인과 전업주부를, 핫플이 아니라 집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루틴이다. 아침 혹은 저녁(매일), 하루에 몇 분씩 혹은 몇 회씩(정해진 분량을), 몇 십 일 가능하면 몇 백 일(반복적으로) 하는 것. 일상에서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것들이 우리를 특별하게 한다. 그러고 보니 루틴 그 자체였던 내 일상에도 새로운 루틴이 들어왔다. 작년부터 매일 아침 20분씩 실내자전거를 타고 3분30초씩(깨알 같다ㅋㅋ) 플랭크를 하는 건강루틴을 이어오고 있다. 나 또한 밋밋한 삶에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온 것이다 ㅋㅋ
과거의 루틴이 스킨케어나 건강 노하우를 공유하는 방식이었다면 현재의 루틴은 일상과 휴식의 영역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과 휴식의 방식을 공유함으로써 루틴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루틴을 통해 자신이 어떤 브랜드나 서비스를 사용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이 어떤 일상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지가 드러난다. 오늘날 루틴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내는지 보여주는 자기관리와 자기표현을 위한 선언적 키워드다.
시간약자에서 시간주인이 된 사람들은 여행과 같은 이벤트성 취미보다 운동과 같은 반복적인 생활규칙을 필요로 한다. 코로나 이후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지고 국내여행도 제한적인 상황이어서 여행보다 운동이 더 각광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현 가능한 가시적 목표, 반복의 기록, 자기관리적 측면은 코로나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관측되는 변화다.
이제 화두는 자기계발이 아니라 자기관리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의미로 채우고자 한다. 무엇을 통해? 각종 기록과 챌린지 그리고 리추얼을 통해서다.
이런 변화는 욜로를 추구하던 우리의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할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분위기 깨는 ‘진지충’이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성실함이 존중받을 것이다. 일회용품 쓰지 말자고 하면 “이거 하나 안 쓴다고 뭐가 달라지냐”며 빡빡하게 군다, 심지어 의식 있는 척한다는 핀잔이 돌아왔지만, 이제는 ‘이거 하나라도 안 써서 지구를 살리겠다’는 마음이 퍼져나갈 것이다. 내일이 없는 듯 쓰는 ‘플렉스’는 더 이상 멋있지 않고 근검절약 ‘짠테크’의 성실함이 소중해질 것이다. 스펙을 키우려는 자기계발은 힘을 잃더라도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자기관리는 꾸준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권위적인 것, 오래된 것, 관행적인 것이 힘을 잃고 좀 더 투명해지고, 효율적이 되고, 수평적이 될 것이다. 바이러스가 가속화한 우리 삶의 뉴노멀은, 개방적이고 효율적이고 수평적이라는 면에서 ‘new generational’s normal’이 될 것이다.
윤리적 감수성에 대한 시대적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소비자는 수많은 선택지에서 조금 불편하더라도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을 시작했다. 지구를 위해 장바구니를 들고, 다회용 용기를 챙겨서 마트에 가 자신의 용기에 식품을 담아달라고 요청한다‘( #용기내서_용기내세요’). 예쁘지는 않아도 재활용하기 좋게 최소한의 라벨지로 포장된 제품을 산다. 디지털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기업에 투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말처럼 “좋아하든 아니든, 변화는 다가오고 있”다. 우리 브랜드는 다가올 변화에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바이러스에 휘둘려 정신없이 보낸 것 같은 한 해 동안 우리는 이렇게 많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활자화된 변화상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2021 트렌드 노트》가 내게 준 가장 큰 힘은 이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길을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 이 책을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이 전하는 마지막 시사점은 이것,
의미에 투자하고, 완벽하지 않아도 시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