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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칸나 Nov 24. 2015

야생 고양이#38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와의 작별

남아메리카 표류기 :: 배낭여행


국경 너머

묵직한 배낭과 함께 다시 국경을 넘으며 나는 아르헨티나로 돌아온다. 국경에서 잠을 잘 수 있는 가장 근접한 마을까지는 20km. 정해진 차 없이 알아서 헤쳐나가야 할 거리이다. 굳이 하나밖에 없는 아침버스를 안타고 오후에 국경을 가로질러 히치 하이커가 되었다. 하늘은 푸르르고 물은 맑고 날은 좀 추운데 인지 20km가 멀지 않게 느껴진다. 왕래하는 차는 거의 없고, 모두 쉽게 나를 무시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역삼각형 얼굴형의 칠레 아저씨가 5km 정도 태워주지만 그의 목적지는 다른 방향이어서 중간에 내려 준다. 첫 단추는 상쾌하다. 노래를 부르고 드넓은 땅과 안데스 산맥을 바라보며 걷는다.


그런데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안 그래도 많지 않은 차들이 모두 나를 그냥 지나가거나 근처에 있는 자신의 목적지를 향할 뿐이다. 우비를 쓰고 걷는데, 바람과 빗물이 차다. 얼마나 걸었나. 손가락과 발가락이 조금씩 감각이 없어지고,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는데 비 피할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처량하게 손가락을 들어 올려 지나가는 차를 잡으려 애써보지만 영 소용이 없다.



그때부터 내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지 알 수 있다. 그저 천 쪼가리 같은 내 텐트 하나를 가지고 추운 길거리 이 밤을 지새울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고 나니 두려움이 생겨나고, 이 먼 거리를 얼마나 걸어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지 막막하다. 차는 거의 다니지 않고, 그저 막막함 속에 추위를 견디며 한 발짝씩 희망을 걸고 걷는다.


정말 간절히 차를 잡으려 하지만, 되지 않고 시간은 흘러 조금씩 날이 저물어  가려하고 있다. 비가 내리고 폭풍우가 치고 바람이 거세진다. 추위가 몰려오고 타인의 자비가 그저 비껴갈 때 나 자신의 모험이란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나약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는 것이다. 지고 가는 배낭의 실질적 무게와 걸을 수 있는 속도와 힘의 한계, 그리고 가야할 엄청난 거리. 2시간을 걸었을까 GPS를 확인하면 목적지까지 그저 끝없다. 또 한 대의 승용차 지나가려 하고, 나는 손가락을 들어 절박하게 차를 바라본다. 그리고 운전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빛나는 눈이 내 처량한 눈빛과 마주쳐서야,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차를 멈춰 세운다.


 “오. 하느님!”

난 비로 젖은 질척한 땅을 박차며 그 차에 다가가 목적지를 말한다. 그 차에는 3명의 아저씨들은 모두 냉담한 표정이다. 그래도 고맙다며 넉살스레, 잽싸게 올라탄다. 짧은 스페인어로 조용히 웃으며 한국 사람이고 어디로 가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들 역시 아무  말없이 그들의 길을 간다.


석양이 지고 산맥들이 다시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안락이 더 꿀같이 다가오고 감사가 넘친다. 풍경이 더욱 빛나는 석양 지는 오후. “아, 다행이다.” 놀랍게도 그들의 목적지는 내가 최종 목적지로 삼은 국경에서 50km 거리에 있는 에스퀠 Esquel을 지나쳐 그곳에 내려준다. 굉장히 무뚝뚝한 사람들은 정말 쿨하게 터미널까지 나를 태워준다. 나는 고맙다고 연신 말하며 그 차에서 내린다. “Gracias!”고맙습니다! 

결국 다른 이의 도움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것. 가끔 어떤 느낌이 나를 이끌 때 모험을 감행한다. 견딜 수 있을 만큼으로 보이는 두려움을 선택한다. 누구의 말처럼 안전불감증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파타고니아와의 마지막

바릴로체 Bariloche

어둠과 비, 텅스텐 조명을 지나 바릴로체에 도착한다. 남미의 스위스, 안데스 설산이 병풍처럼 길게 펼쳐져 있고 호수와 유럽 풍의 집이 멋지게 어우러진다. 꿈결 같은 바릴로체에 와도, 한참을 북쪽으로 올라온 것 같았는데 아직도 너무나 춥다. 시리다.

비가  오락가락해서 좋은 풍경도 있고 아닌 날도 있다. 아름다운 풍경으로 마음을 채우고 쉼을 얻는다. 그러나 여전히 너무 춥다. 또 멍하니 앉아서 상념에 빠진다.



불편함, 미련함, 느리고 답답한 것이 더 많은 생각과 경험을 하게 하는 지도 모른다. 아직도 내게 그것들은 어색하고 환영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경박한 곳에 여유와 고요함을, 내적 성장을 더해준다. 여행도마음가짐도 더 깊은 강을 찾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여행이 이제 ‘돌아가는 길’로바뀌기 시작한다. 삶은 영화가 아니어서 끝내고 싶을 때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어렵다. 그저 침묵하는 것이 최선인 경우가 허다하다. 따뜻함이 필요한 추운 날을 견디고 있다. 그렇게 파타고니아와 인사한다. 아름다운 바릴로체를 마음에 담고 몸과 마음에 따뜻함을 주기 위해 이 지독히 외로운 여정을 다른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열대 식물과 같아서 더 따뜻한 곳이 내게 에너지를 줄 것만 같다.


야간 버스

몇 번째인 걸까. 이런 야간 버스를 타는 것은. 또다시 버스 의자에서 하룻밤을 덜덜거리며 보내겠지만 아침햇살이 더 상쾌하기를 바라며 잠에 든다. 설산들이 멀어져 간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따스함을 찾아 적도를 향한다. 선잠을 자다 일어나면 밝은 달이 힘을 서서히 잃어가고 아침이 밝아온다. 밤새 내 머리 위에 너덜너덜, 대롱대롱 걸려있던 위협적인 삼성 TV도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세상이 분홍색으로 물들어가는 달과 해가 공존하는 시간이다. 새하얗고 둥근 달과 불타오르는 해, 분홍색대지 위 따뜻함의 상징 야자수를 아주 오랜만에 스치며 이제 파 타 고니아를 완전히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 귀국을 위한 비행기 티켓을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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