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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님 Oct 14. 2022

서로가 서로에게.

다정한 서술자 '임옥희 교수님' 강연 후에 쓴 글

두께가 얇은 유리컵은 작은 충격에도 일순간 맥없이 조각나 버리고 만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냥 즐거웠던, 매 순간의 안녕이 궁금한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 소소한 충격들이 겹쳐지며 유리컵엔 균열이 일어났다. 결국 여럿이 엉킨 관계는 출구를 찾지 못했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한때 친구였던 이들은 오랜 시간 마음에 남을 얼룩이 되었다.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내 미숙했던 처신에 대한 후회는 늦은 밤이되면 고개를 들었다.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어가며 상대와 나의 잘못을 헤아리느라 허덕이며 보낸 두 달. 그 끝에 내린 결론은 그러했다. '나는 좋은 사람인척 가면을 썼지만 내가 주는 만큼 상대가 마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실망과 미움을 키우는 사람이구나. 이제는 자로 잰 듯 상대가 주는 만큼만 나도 내 마음을 줘야지, 그동안 작은 그릇을 가졌으면서 큰 그릇을 가진척하며 사느라 참 힘들었었네.' 갈등을 직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자신까지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책방에서 하는 여러 가지 일들도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에너지를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렇게 얕은 결론에 다다랐을 무렵 심야책방 행사에서 임옥희 교수님을 만났다.


작은 체구에 깡충한 단발머리, 동그란 안경과 커다란 백팩. 케이크 박스를 손에 든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책방에 들어섰다. 살면서 지금껏 한 번도 만나본적 없는 말랑말랑한 말씨를 가진 백발의 할머니. 남쪽 어딘가를 여행 하다가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올라왔다고, 머물렀던 아름다운 길에 대한 설명으로 강의가 시작되었고 자신이 최근 읽었던 책과 고어 자본주의를 엮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흥미로운 보따리가 하나씩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 <두 늙은 여자>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본다.

(* 지상의 모든 생명이 가진 몸과 살을 이윤의 대상으로 보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샤야크 발렌시아는 그로데스크 한 <<고어 자본주의>>라고 명명한다. <강연 원고 일부 문장 요약 발췌>)


"벨마 월리스의 <두 늙은 여자>는 작가가 어린 시절 들었던 알래스카 인디언 부족의 전설을 다시 쓴 것이었다. 겨울은 다가오고 극심한 기근이 들자 두 늙은 여자 칙디야크와 사Sa는 부족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 알래스카에서는 극심한 기근이 들면 입 하나라도 덜려고 무리 중에 양식만 축내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늙은이들을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그 세월 동안 열심히 일했고 살 권리가 있지만 부족원들은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칙디야크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운 삶을 칙디야크는 끝장내고 싶었다. 하지만 칙디야크는 자기가 죽어버리면 홀로 눈 속에 남겨지게 될 사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사는 칙디야크의 손주가 몰래 두고 간 손도끼로 힘들게 사냥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버림받았던 두 늙은 여자는 혹한을 넘기고 살아남아서 봄을 맞이한다. 그들은 여전히 굶주림에 찌들린 채 되돌아온 부족에게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지혜를 전수한다. " -<강연 원고 일부 문장 요약 발췌>


다소 고전적이고 뻔한 스토리라고 느낄 수도 있을 법한 이 이야기에 시선이 멈추었다. 교수님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가 노인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나아가 돌봄과 연민의 힘이 시장화된 개인의 이기심보다 항상 앞서야 한다는 이야기로 뻗어 나갔다. 강연 끝에는 '결국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고약한 시대를 살고 있는 만큼 돈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우리 도처의것들을 살피며 살아가야 한다', 는 메시지가 완성되었다. 나는 잊어버렸던 것을 되찾은 기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에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방과 같은 공간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공간을 지키는 일이 쉽지않음을 잘 안다는 교수님의 문자 메세지를 받았다.


가난이 문학적 자산이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10년간 거의 매일 김밥만 먹어온 그림책 작가가 등장하는 <자린고비> 같은 짠내 나는 이야기가 좋다. 돈보다 소중한 것들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고마운 책들. 나는 앞으로도 통장잔고와 이상의 극단에서, 사람들과 관계 안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으로 주변사람들, 혹은 처음 본 책방 손님들에게 징징거리며 살아가겠지. 하지만 이제는 가야할 길을 잃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사실만을 이정표처럼 떠올리려고 한다. 자신을 지키면서도 인정과 지지가 마르지 않는 샘물같은 공간을 꿈꾼다. 이야기 공동체와 난잡한 돌봄은 고어 자본주의 시대에 숨 쉴 틈이 되어줄 것이다.



탱의 질문 1. 제가 보기에 교수님은 참 단단한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교수님도 자신을 신뢰하지 못해 힘들었던 적이 있으신가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시며,

" 나 요즘도 매일 밤에 이불 킥 하는데! 난 지금도 매 순간을 후회하면서 살아요!"


누군가의 질문 2. 최근 글쓰기 공동체로 함께 하던 이들과 관계가 단절되는 경험을 하였는데요. 교수님은 공동체를 오랜 시간 이끌어온 노하우가 있으신가요?

우리 단체에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오래 이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싫다고 떠났던 사람들도 가만히 있으니 여기만 한 데가 없다며 다시 돌아오더라. 그러면 또 받아주고 그랬다.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타인에게도 관대해야 한다. 관계를 한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을 기본값으로 둬야 한다.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라.


난잡한 돌봄은 돌봄과 모성이라는 재생산 미래주의의 약속을 이행하는 대신, 타종과의 상호의존과 공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난잡한 돌봄은 보편적 경제주체가 아니라 보편적 돌봄 주체를 사회의 기본가로 하는 것이다. 돌보는 공동체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돌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거나 돌봄을 시장으로 외주화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의 돌봄 역량을 확장하기 위해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퀴어/생태/사회주의 페미니즘으로 난잡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다. 난잡한 친족은 혈연, 가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상호 의존하는 말, 살, 흙, 물, 바람, 동물, 식물, 등 지상의, 지구행성의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 맺기로 확장된 것이다.

  - 임옥희, <너의 작업실 강연 원고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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