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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님 Jan 15. 2023

신의 한 수

나이 서른이 되어도 썸을 타면 손바닥 발바닥이 시도 때도 간질거린다. 손이라도 닿을라치면 찌릇찌릇 전기가 오고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에 온 감각을 열고 반응하게 되기도 한다. 마치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날이 있다. 그날도 그랬다. 하늘은 파랗고 나무들은 생명력을 뽐내는, 바람이 기분 좋게 부는 한 여름날 우리는 데이트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운전을 하는 그의 옆모습은 참으로 멋졌다. 요즘 잘 나가는 연예인으로 따지자면 정해인을 닮았다(?). 묘하게 보호해 주고 싶은 본능을 일으키는, 내 생애 다시는 못 만날 남자. 나는 콩깍지가 제대로 씌였고 그에게 끝없이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얼마 전부터 아침저녁으로 나의 안부를 묻던 그에게 어부가 투망을 던지듯 속내를 숨기고 먼저 음흉한 제안을 했다. 내가 일하는 회사 콘도에 놀러 와서 2박 3일 머물며 여행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2박 3일의 데이트가 성사되었다.


첫 번째 데이트 날, 강원도 영월의 산새는 높고도 험했다. 핸들을 쉴 새 없이 꺾어야 했고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정상은 가까워지지 않는 듯했다. 그즈음 신호가 왔다. 혈액 속의 노폐물과 수분이 신장에서 걸러져서 방광 속에 괴어 있다가 요도를 통하여 몸 밖으로 배출되는 액체. 그것이 세상밖으로 나오겠다고 조금씩 자극을 보내온 것이다. 나는 평소에도 오줌을 잘 참지 못하는 편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불에 지도를 그려 엄마에게 '웬수덩어리'라는 말을 들었고, 무려 중학교 때 선생님께 화장실 가겠다는 말을 못 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방광에 힘을 풀어버린 전적도 있다. (3년 내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이번에도 내 인생 중요한 때에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인가. 머릿속은 복잡한데 계속되는 오르막길. 운전 중인 그의 얼굴도 한번 보고 창밖도 바라보며 정신을 다른 곳에 쏟아 보려 애썼지만 나의 정신은 다시 방광으로 향했다. 그렇다. 방광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차마 이 정해인남에게 달콤한 데이트도중  화장실을 가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오르막을 반복하다 내리막 길이 시작되었다. 마음속으로 '조금만 조금만'을 외치며 참아본다. 그러나 나의 방광은 인내심이 없다. 이제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머릿속엔 세 글자가 가득 찼다. 화. 장. 실. 거의 산을 내려온 것인지 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식당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는데 우물쭈물하다 말할 찬스를 놓쳤다. 그러는 사이 나의 오줌 분노게이지는 98%에 임박하고 있었다. 깊은 산을 빠져나와 조금 완만한 언덕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기 50미터 앞 언덕 중턱에 나무로 지어진 간이 화장실이 보였다. 바로 지금이다!


"저... 기... 나 저기다 좀 세워줄래!"

부탁이 아닌 명령에 가까운 말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그가 언덕아래 차를 세움과 동시에 내 힘없는 방광 오줌 게이지는 은 99.... 100%에 도달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랫도리가 뜨뜻해짐을 느꼈다.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자동차 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찰나 내가 엉덩이를 질펀하게 뭉개고 있던 자리를 흘낏 돌아보았다. 이미 그 몹쓸 액체가 시트를 일부 촉촉하게 적신 후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정체 모를 벌레들이 들끓는 그 간이 화장실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가 나머지 액체를 시원하게 쏟아냈다. 그리고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누군인지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다는 비굴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필 그날따라 입은 청바지엔 오줌얼룩이 졌을 테고 푸르디푸른 영월 언덕에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귀가 축 늘어져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정해인남에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추한 안녕을 고해야겠다. 자동차 문을 열고 조수석 의자, 내가 자국을 남겼던 그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시트가 젖은 흔적이 없이 말끔해져 있었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다면 좋으련만 내가 급한 일을 처리하는 사이 그가 휴지로 자국을 지운 것이다. 그 순간에 이상하게도 정해인남과 결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절대 잊히지 않을 일생일대의 굴욕이자 대참사를 함께한 이 남자와 결혼이 아니면 이별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치미 떼고 모른 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몇 가지. 그때 그 차(당시 정해인남이 버스를 타고 내려와 내 차를 운전한 것이다) 트렁크에 운 좋게 실려있던 바지를 주유소 화장실에서 갈아입었다는 사실, 할머니가 운영하는 김삿갓 마을 개울가 백숙집에서 고스톱을 치고, 옻닭을 한 솥 나누어 먹은 뒤 다시 콘도로 돌아와 오락실에서 총싸움을 하며 신나게 놀았는 것이다. 젖었던 팬티가 바싹 말랐을 때 콘도로 돌아왔고 그날 밤 우린 역사를(?) 이루었다. 나는 그가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2박 3일 숙박 예약을 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너의 작업실 매일 글쓰기방에는 비밀요원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글을 쓰며 서로의 일상을 가감 없이 나누고 있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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