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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님 Feb 10. 2023

책방에서 회식하고 갈래?

자취방에 누워 전람회의 '새'를 즐겨 듣던 볼 빨간 대학 시절.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동기, 선배들은 대부분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아니 스무 살의 나는 너무 순진해서 세상사람들이 그냥 다 착하게 보였던 것도 같다. 거기에 더해 고3딱지를 떼고 더 큰 사회로 나온 세상물정 모르는 새내기들, 그런 신입생들을 바라보는 선배들이 오가는 곳이었으니 대학은 다정한 사람들의 세계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처음으로 술을 먹어보았다. 주머니 사정이 비슷비슷했던 우리들은 소주에 새우깡을 안주삼아 먹으며 새벽이 오도록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제는 20년이 흘렀으니 그때 정확히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분위기, 함께 했던 동기들과 선배들의 표정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어제는 책방에서 인연이   작가님과 모처럼 저녁 약속이 있었다. 책방 근처 선술집에  명이 앉아 '고백'이라는 술과 함께 파전, 소면골뱅이 무침을 먹었다. 매번 책방을 오가며 스치듯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면으로 앉아 얼굴을 마주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사람이 만난   번째인데도 어제는 저녁도 먹지 않고 바로 술집으로 직행해서 인지 특히나 기분이 멜랑꼴리 했다.  작가님은 언제나 통쾌한 답을 시원시원 내려주는 멋진 선배언니 같았고,  다른 작가님은 우는 소리를 해도  받아주고 고향에 간다고 하면 차표를 끊어주는 속 깊은 동기 같은 사람이다.


목적도 없고 주제도 없는 사는 이야기는 언제나 좋다. 이야기를 탁구공처럼 튕기다가 내 얼굴은 이내 불타는 못난이 고구마가 되었다. 초점 없는 눈빛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니 불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괜찮냐, 집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묻는 것이다. 나는 그저 "좋다. 기분이 좋다."라고 대답했고 반쯤 풀린 눈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신입생 때도 그랬다.)시간은 금방 지나갔는데 아쉽게도 10시에 가게 문을 닫는다고 직원이 와서 안내해 주었다. 나는 딱 11시까지 더 놀자며 질척거렸다. 책방 근처 새로 생긴 와인가게에 가자고 제안했다. 내추럴 와인가게는 비싼 곳이라며 (나는 몰랐다. 한 병에 3만 원이면 먹는 줄 알았다.) 거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조금 걸어 도착한 곳은 정말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소주, 맥주, 와인을 모두 파는 곳이었다. (이곳을 나의 아지트로 찜했다. 함부로 누군가에게 알려주지 않겠다.ㅋㅋ)

감바스와 하우스와인 세 잔을 시켜놓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11시 30분이 되어서야 억지로 엉덩이를 떼고 가게를 나왔다. 제법 찬 공기가 돌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다른 선배 언니는 "내일 봐" 하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지하철 역까지 같은 방향인 동기와 걷는다. 묻고 싶은 것이 50가지쯤 있는데 우물쭈물하다 보니 지하철 역 앞이다. 갈림길에 서서 우산을 쓰고 가라고 하니 자꾸만 방수잠바라고 한다. 방수잠바이긴 하지만 라쿤털이 비에 졌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깔끔하게 뒤돌아서야 할 타이밍이다.




너무 오랜만에 술을 마신 탓인지 집에 도착해도 술이 깨지 않고 알딸딸한 상태로 두 사람과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무심결에 실수했을 말, 그 말을 '나쁜 뜻은 아니었던 걸 알아'라고 포근히 안아줄 그들의 얼굴을 함께.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대책 없이 자꾸만 책방 사람들이 좋아질까. 작년 말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이 마음을 줬다가 이별을 경험하고 난 후로는 조금씩 마음에 거리를 둔다. 그런데 이렇게 대학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멋진 여자들을 만나면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리고 또 부질없는 생각을 한다.

"우리 헤어지지 말자. 상처주지 말자. 백발의 할머니가 될 때까지 서로 응원하고 지지하면서, 남편 욕도 하고 세상 욕도 하면서, 다 잊혀 가는 과거 이야기도 끌어올리면서 그렇게 살자."  


1차는 선배언니가 계산을 했고 2차는 내가 돈을 내고 싶었다. 그런데  동기가 자꾸만 절반씩 돈을 내자고 고집을 피운다. 1차에 비해 너무 작게 나온 금액 28,000원. 집에 도착하니 입금 문자가 와있다. 18,000원. 아무리 생각해도 계산이 이상하다.



덧) 오늘 책방에 오니 선배 언니는 너무 졸려서 못 있겠다며 집으로 간다. 이제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멀쩡한 나이가 아닌 것이 아주 조금 씁쓸할 뿐 다른 모든 건 그때보다 좋다. 다음 주에 오래 준비한 시험에서 노력보다 못한 결과를 받은 후배와 회식 일정을 잡아야겠다.  그때는 멋지게 술값을 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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