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을 잘 못 맞추어 4월 정기산행을 날린 트라우마 때문에 AM 4:30, 알람시간을 재차 확인했다. 설렘에 잠은 자는 둥 마는 둥.. 28인승 우등버스에 오르자마자 안대와 귀마개를 장착하고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구례에 도착 미리 주문해 둔 육회비빔밥과 떡국으로 배를 든든히 채웠다. 테이블마다 가스레인지 위 양은 주전자가 팔팔 끓고 있었다. 투명하고 노오란 보리새우 국물은 육회비빔밥과 환상의 짝꿍이었다.
완주팀? 이지팀!
꼬불꼬불 산길을 오르고 오른 고마운 버스가 해발 1,100m 성삼재에 우릴 내려주었다. 목적지인 만복대까지 거리는 5.4km, 높이가 1,438m이니 실제로는 3시간 여 능선길로 300여 미터 고도를 높이는 평이한 코스다.
'진짜 산사람'들로만 구성된 CJ산악회원들에겐 다소 싱거울 수 있는 코스인지라 만복대 이후 정령치~고리봉~세걸산~세동치~전북학생교육원까지 총 12.5km짜리 코스를 계획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릴 거라는 예측과 하늘 가득한 운해 때문에 조망이 별로일 거라는 의견이 나왔다. 결국 두 팀으로 나누어 완주팀과 이지팀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아직 정상이 아닌 허리 상태를 감안해 완주팀을 포기하고 정령치까지만 가는이지팀쪽에 섰다.
어머니산, 지리
성삼재에서 이미 눈앞에 펼쳐진 운해와 굽이굽이 펼쳐진 능선들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어제 종일 내린 비로 좁은 흙길이 촉촉하게 젖어 폭신하다. 설악, 한라에 비해 지리산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풍부한 물과, 부드런 흙길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산, 그래서 어머니 산이다. 눈 아래 펼쳐진 구름과 파란 하늘, 그리고 땀을 씻어주는 시원한 바람까지 My healing 3 총사를 온몸으로 예배했다.
좁지만 폭신한 지리산 능선길
조릿대 사이 소로
초록 가득, 폭신한 길길길
능선을 넘지 못하는 구름의 신기한 풍경
구름아래 부드런 초록 능선들
코발트빛 하늘로 솟아 오르는 솜사탕 구름
멀리 천왕봉이 보일락 말락
운해속 반야봉
산을 즐기는 두 가지 정답
귀가 후 산악회 밴드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니, 이지팀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다. 시간에 대한 압박이 없으니 한결 여유로울 수 밖에.
걷고 쉬고 오르고 찍고 먹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렸다. 머리 숙여 손톱만 한 들꽃도 담고, 바위를 밟고 멋진 포즈도 취하고, "사진으로 못 담지 못 담아..." 중얼거리며 막힌데 없이 탁 트인 하늘과 산, 구름을 조망했다.
완주팀은 완주팀대로 보람과 자부심을 선물로 받았을 것이다.
빠르면 빠른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산은 골고루 선물이었다.
반칠환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 새해 첫 기적(전문), 반칠환
씀바귀의 앙증맞은 노란꽃
백당나무의 순백색 꽃잎
화사한 붓꽃
진한 향기에 돌아볼 수 밖에 없었던 찔레꽃
그동안 오른 정상 봉우리 이름 중 최고!
하산 후 주린 배를 채워준 지리산 흑돼지의 쫄깃한 식감은 한 동안 못 잊을 것 같다. 이렇게 잡내 없고 탱글탱글한 지방이라니!
(P.S.)
- CJ산악회의 절반, Y대장이 허리통증으로 하루 전 산행을 포기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였다. 대신 O, L, H 등 베테랑 회원들이 완주팀, 이지팀, 후미대장을 맡아 맹활약을 해 주었다. 리더의 부재가 크게 느껴지면서도, 새로운 가능성도 확인한 좋은 경험!
- 완주팀 15명, 이지팀 13명으로 출발했지만, 정작 완주한 사람은 O와 K, 남 녀 대표 한 명씩 뿐이었다. 두 사람이 쏜살같이 내 달리는 바람에 나머지 13명은 쫓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고리봉까지 갔다가 정령치료 회귀해 버스에 올랐다. 철인으로 소문난 2명 중 누가 경쟁심에 불을 붙였을지는 오직 둘만 아는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