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때도 있다
애초부터 이혼을 꿈꾸는 사람은 없다.
요즘은 서로를 응원한다며, 친구로 남기로 했다며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셀러브리티들의 이혼소식도 있지만 사실 그 과정은 다 지난하다.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이혼이라는 경험을 해보기로 결심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살다 보니 상황이 안 좋아졌고, 같이 함께 할 수 없기에 하게 되는 것이 이혼이다.
이혼을 하고 나면 두 가지 타입이 있는 것 같다.
쉽게 주변에 보는 유형은 전 배우자를 나쁜 사람으로 몰며, 나는 운이 없었다로 자신이 피해자임을 부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드문 타입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혼에 대해서 굳이 디테일하게 운을 띄우지 않는 유형이다. 굳이 누가 물어보지 않는다면.
첫 번째 유형은 이혼 경험(?)을 안 좋게 활용하는 쪽이다. 굳이 그렇게 떠벌려 봤자 사실 본인에게 좋을 것이 없다. 그 어떤 이유가 되었던 이혼은 공동의 경험이다. 상호 간의 손해이고 상처이다. 그러니 뭘 더 떠벌려? 이미 끝난 것을...
두 번째 유형은 이혼 경험(?)을 그래도 뭐라도 나은 방향으로 활용하는 쪽이다. 아. 뭐 굳이 활용한다기보다 좀 더 성숙한 쪽이다. 남 험담한다고 뭐가 달라져?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는 현명한 쪽.
나는 현명한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첫 번째 타입은 아니다. 상대방 험담은 이혼 전에나 하는 것이다. 할 말이 없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 내 시간과 에너지 자원에 도움이 될 것이 없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좋은 점을 따지자면 이혼이라는 경험을 통해 나는 관계라는 것이 어떻게 종결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 겪었다. 씁쓸하다. 모든 인간관계가 이러하다면 '인간미'라는 것은 세상에 남아나질 않겠네. 다시 사랑을 하는 것도 두려워진다. 결국 또 인간이란 누구나 이기적인 존재. 나도, 당신도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치졸하게 헤어질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 그 씁쓸한 경험의 결론을 사회생활에 활용한다. 누군가 나를 공격하고 비난해도 그게 그렇게 슬프지 않다. 한 때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여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아도 헤어지며 서로 쟤고, 물고 뜯고 해 보니 사회생활하면서 어떤 목표를 위해 공격하는 것은 그저 일을 하는 사람의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이 다 이렇게 끝나나 허무하고 씁쓸하다 생각할 필요도 없겠다. 그 시간시간만큼을 따로 떼어내서 좋은 것들만 간직하면 된다. 지난한 진흙탕 싸움을 돌이키며 곱씰을 필요는 없지만 아이가 탄생한 순간 같이 나눴던 기쁨등은 그것만 떼어서 훈훈하게 간직하는 법도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 한 사람에도 여러 면모가 있는 것이다. 그중 끝이 진흙탕이었다고 전체를 매도할 필요도 없는 법이다.
위치가 자리가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몰기도 한다. 팀을 꾸려가다 보면 회사라는 조직에서는 목표를 달성해야 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팀원들에게 늘 사랑과 존경받는 상사가 될 수가 없다. 누군가는 나를 비난하고, 누군가를 섭섭해하고 그게 조직생활이다. 그런데 이것도 그러려니 하게 된다. 우리는 다 월급 받고 사회생활하는 사람들 간혹 미성숙한 어린 자의 자라지 못한 언행의 대상이 되더라도 그게 무엇이 그렇게 슬픈가? 그렇게 분노하게 되지도 않는다.
형제, 부모, 자식도 간혹 참 너무 하다 싶을 때가 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 보듬어주기를 바라지만 사실상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는 할퀴는 경우도 많다. 그 조차 그려려니 한다. 한 때 나의 가족이었던 배우자와도 그랬었던 것을... 형제, 부모, 자식 그들도 모두 사람이다. 단지 형제, 부모, 자식과는 '이혼'이라는 방법이 없을 뿐이라 징글징글하게 감정씨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그려려니 한다.
나는 내 이혼의 경험을 이렇게 활용한다.
이전 같았으면 듣기만 해도 분노했을 나를 향한 표현에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이 독한 푸념과 비수가 내게 꽂혀도
나는 그게 그다지 아프지 않다.
#이혼활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