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쮸댕 Dec 13. 2022

시절인연 -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밀라노 코르시아 서점 이야기

불교용어에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원뜻은 '사물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 특정한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이지만, 약간 다른 의미로 '지나간 한때의 인연, 영원한 건 없기에 한때뿐이었던 순간들'에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그 관계가 시절 인연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기억되는 것은 다시 만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당시의 내 모습이 그리워서 일수도 있겠다. 이 책은 작가가 이십 년 전 밀라노에서의 시절을 회상하고 쓴 글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에 대한 그리움이 곳곳에서 묻어날 때 이 단어가 떠올랐다.


코르시아 서점은 1960년대 밀라노의 가톨릭 신부이자 시인인 다비드를 중심으로 모인 젊은이들의 공동체였다. 말 그대로 서점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공동체라는 더 너머의 개념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후원자인 상류층 노부인과, 교회 당국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주인, 그리고 사상적 중추 역할을 했던 구성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각자가 꿈꾸는 이상과 자유가 있었다. 소박한 일상이지만 그 안은 순수한 열정으로 충만했다.


누구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겠다는 욕심으로 화제를 독차지하려는 사람이 있는 밤이면 시간의 흐름이 더디게 느껴졌다. 우리의 이런 대화가 알고 보면 호스트의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싶어 문득 공허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초대를 받으면 또 기대감을 안고 찾아가게 되는 이유는 역시 대화로 만들어내는 허구 세계의 즐거움 때문이었으리라. 오늘은 재미있었다. 혹은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마치 작품을 논하듯 그날 대화의 성과를 비평했다. 88p


 일본인인 작가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가 코르시아 서점의 세계로 초대를 받는다. 때로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그렇지만 점점 그 공동체 안에 스며들면서 밀라노의 귀족사회와 작가, 시인, 성직자 등 다양한 직업군과 계층의 면면을 관찰한다.


 단편처럼 엮인 각 구성원들의 인생을 보면 한 줄로 축약되는 역사적 사실에도 수백 가지 서사가 얽혀있다는 문장이 깊게 와닿는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절을 풍미했지만 실은 각자 다른 사연을 가졌다. 다른 이상과 성향 때문에 종국에는 서로 다른 길을 택하기도 한다. 다비드와 카밀로처럼. 책의 마지막 부분에 '고독이 한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황야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 같다'의 구절에서 그 의미가 더욱 도드라진다. 씁쓸한 결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깊은 우정만으로도 한 때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었음을 보았다.


우리는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이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 자체인 양 그곳에서 이런저런 이상향을 그려갔다. 서점을 처음 시작한 다비드도, 그의 주위를 지키던 친구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젊은 우리는 각자 마음속 서점의 모습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외곬으로 나아가려고만 했다. 230p



스가 아쓰코의 다른 작품들
젊은 날 마음속에 그린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을 서서히 잃어감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고독이 한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황야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 같다. 231p

 

어쩌면 그런 젊은 시절을 지나온 사실만으로도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봐도 그렇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밀라노, 안개의 풍경>과 <베네치아의 종소리>를 썼다. 작가가 쓴 수많은 이야기의 씨앗들이 어쩌면 코르시아 서점에서 나온 게 아닐까.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나. 혹은 아직 오지 않았나. 유한함을 인식하고 지금을 의미 있게 살아간다면 이 또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코르시아 데이 세르비 서점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SF가 인문학적 고민을 담을 때 - 테드 창, <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