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강력한 이유
“아빠, 나 인라인스케이트 안 하면 안 돼?”
아니 왜 또? 그렇게 아빠를 부끄러운 상황에 놓으면서 시작한 인라인스케이트 강습이었습니다. 매주 차를 태워 왔다 갔다 수고스럽게 한 지 한 달만입니다. 아직 다리에 힘도 덜 들어갔고, 강사님도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십니다. 기왕 시작했으니 좀 더 제대로 탈 때까지 가르쳐 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딱 4번 해 보고 말다니, 괜히 한 달의 수강료도 아깝습니다. 짜증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옵니다.
그냥.
그냥이라니, 그냥이 어디 있어. 성의 없는 대답에 더 화가 치밀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꽤 오랫동안 배우던 피아노를 몇 개월 전부터 종종 그만두고 싶다고 하던 차였습니다. 어디 피아노뿐이겠습니까, 방과 후 학습으로 배우는 한자 수업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저가 하고 싶다고 졸라대었던 것들입니다. 아직 어려서 금세 싫증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한동안 좀 덜하다 싶었는데, 오랜만에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런 식으로 뭐든지 금방 질리고 쉽게 포기하는 버릇이 생길까 봐 늘 걱정입니다.
아이를 다그칩니다. 정확한 이유를 말해보라고 되물었습니다. 엄마와 더 의논해 보겠노라 짜증을 담아 답해주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다시 ‘그냥’ 이라고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답합니다.
색시와 이야기했습니다. 아이가 뜨거운 볕에서 운동하느라 힘들어하는 것 같아. 아는 친구들이 적은 것도 한몫하는 것 같고. 아이의 ‘그냥’은 다양한 이유로 바뀌어 색시에게 전달됩니다. 색시는 의외로 금방 동의합니다. 처음부터 오래 가르칠 생각은 없었나 봅니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그냥’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또 ‘그냥’만큼 솔직하고 명확한 이유도 없습니다. 아이에게는 분명한 이유와 근거를 요구했지만, 설명하기 어렵기는 해도 ‘그냥’은 생각보다 중요한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냥’만큼 모든 당위와 목적을 이기는 힘도 별로 없습니다. ‘그냥’을 이기려는 모든 것은 ‘억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지 모릅니다.
흔히 ‘좋아하는 것을 하라’, ‘꿈을 가져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방법’, 그리고 ‘꿈을 꾸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만큼 살아 보았으니 모든 일의 순서가 있고, 때로는 지루한 시간을 지나야 진짜배기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또 진짜배기를 알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우리가 실제로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 적습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꿈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아직 아이일 때, 그리고 제가 곁에 있을 때, 좀 더 ‘그냥’을 쫓아가도록 놔둘까 싶습니다. ‘그냥’을 쫓다가 정말 ‘그냥’ 좋은 것이 생기면, 진짜배기도 찾고 자신의 인생에 책임질 날도 오겠지요.
그나저나 인라인스케이트 선생님은 ‘그냥’을 이해해 주시려나 모르겠네요. 전화드려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색시를 '그냥' 사랑하고 있었네.
이미지 참조 : http://www.designerspic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