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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디트 Jan 04. 2016

암, 병신년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

스물여섯 살 난 부서의 막내 기자와 단둘이 밥을 먹는 게 무섭다. 그 친구는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 주절주절 늘어놓는 건 내 몫이다(라고 쓰고 보니 오히려 내 쪽이 먼저 이 소리 저 소리 기선제압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무서운 게 뭐냐면 밥 먹고 뒤돌아서 생각해 보면 ‘베테랑’인 척 으스댔던 게 ‘가오’ 떠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넌 (새파란) 후배고, 난 (까마득한) 선배야’ 라는 관계의식을 깔고 가니 나오는 말은 죄다 지적질 스타일이다. “내가 진짜 너만 했을 땐 퇴근하고도 일 생각만 했는데”, “내가 선배로서 하는 말인데 그 치마는 좀…”, “우리 땐 안 그랬는데 너희 동기들은 좀 그렇더라”, “빨리 연애부터 해야지, 노처녀 되는 거 순식간이야” 등등 일 얘기에서부터 인생 조언까지, 허세작렬 충고식 레퍼토리다. 


“아, 네네” 하며 얌전히 들어준 막내에겐 고맙지만 안다. 이게 바로 ‘꼰대질’이라는 걸. 내가 뱉었던 말들엔 ‘꼰대 육하원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뭘 안다고’, ‘어딜 감히’, ‘왕년에’, ‘어떻게 나한테’, ‘내가 그걸 왜’ 말이다. ‘꼰대’는 그렇다. 나이 먹은 게 뭔 자랑이라고 툭하면 나이로 서열 따지고, 소싯적에 어쩌고를 남발하며, 내 말이 길이요 진리이니라 내세우고, 요구하지도 않은 인생 상담까지 마구 날린다. 세상은 넓고 꼰대는 많다고 했던가. 아무리 꼰대행 가속페달에 발을 올려놓은 나인들 왜 모르겠는가. ‘준 꼰대’에서부터 자신이 꼰대임을 자각 못 하는 ‘중증 꼰대’까지 득시글거리는 세상이니.


요사이 꼰대라는 말이 꽤 흔하게 쓰인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고등학생들이 부모나 선생님을 빗대 ‘우리집 꼰대’니 ‘담탱이 꼰대’니 하며 자기들끼리 쓰던 말이었는데 말이다. 이젠 집은 물론 직장이나 군대 등 다양한 사회에서 선배나 상사 같은 구세대를 대상으로 꼰대니 꼰대질이니 부른다. 원래 남성을 가리키는 단어이나 요즈음은 그렇지도 않다. 또 꼭 나이 많은 이들을 지칭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보편적 진리라도 되는 양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사람은 죄다 꼰대인 거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어쭙잖은 주장을 내세웠다가 “님, 꼰대임?” 댓글로 도배되는 식이다. 

왜 꼰대일까.

헬조선과 흙수저에 절망한 젊은 세대가 비꼬는 뒷담화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그들 세대를 이해하는 척 좀 하지 말라는 시위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하루하루 버텨내는 데, 선배랍시고 갑(甲)질이 웬 말이냐는 아우성이다. ‘배부른 소리나 하고’, ‘이기적이고’, ‘제대로 노력하지 않는’ 세대라고 함부로 욕하지 말고 과거의 기준으로 자신들을 평가하지 말라는 거다. 

문제는 이렇게 규정화된 청(靑)-노(老) 반목은 우리 사회에 또 다른 갈등 관계 씨앗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꼰대는 꼰대끼리, 꼰대를 까는 이들은 그들끼리 뭉쳐 서로를 손가락질한다. 사회심리학에 집단 극단화(group polarization)라는 현상이 있다. 어떤 집단을 이룬 뒤 개인들의 반응은 평균 집단을 이루기 전보다 더 극단적으로 되는 현상을 말한다. 손가락질이 주먹질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분열증의 해결책은 소통이다. 네트워크와 정보가 넘치는 뉴미디어 시대 아닌가. 조금만 비판적이고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다른 세대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무궁무진하다. 꼰대시대의 미덕을 찾아내고 꼰대질에 등 돌린 이들을 돌아앉게 만들 수 있는 융통성의 공간 말이다. 


나이 한 살을 더 얹으며 꼰대방지 5계명을 외웠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말하지 말고 들어라, 답하지 말고 물어라/ 존경은 권리가 아니라 성취다’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 다짐해 본다. 더구나 새해는 병신년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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