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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디트 Feb 07. 2017

‘1984’가 ‘2017’에게

‘1984’를 읽은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 책장에 꽂힌 책들을 훑어 보다 제목에 이끌려 집어 든 소설이었다. “조지 오웰이란 작가는 그 옛날 인류의 미래가 이렇게 암울하고 비관적이 될 거라고 봤구나.” 당시 내 독후감은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여느 SF영화처럼 “좀 황당무계한 이야기네”였다. 어쩌면 중1 소녀에겐 주인공이 인간적인 자아를 찾기 위해 사랑에 빠지고, 연인과의 밀회를 즐기는 부분이 더 흥미진진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훗날 나중에야 이 소설이 전체주의와 정치 선전, 개인의 말살, 미디어와 기술의 인간 통제 등을 아우른 엄청난 비유와 통찰이 담긴 작품이라는 걸 알았지만 말이다.


최근 미국에서 ‘1984’가 때아닌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달 2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 참석 인파를 놓고 벌어진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 논란 때문이다. ‘역대 최대 취임식 인파’라는 백악관 브리핑을 놓고 거짓말이라는 비판이 일자 백악관 선임고문이 “거짓말이 아닌 대안적 사실”이라며 옹호하고 나선 거다. 이 말장난 같은 ‘대안적 사실’이 ‘1984’에서 그려진 진실을 덮는 정치 선전과 대중의 의식을 말살하는 권력층의 언어 왜곡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더해 ‘트럼프의 미국’을 놓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헌법질서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 ‘이상적인 국가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 정권이 ‘1984’ 속 위험한 권력인 ‘빅 브러더(big brother)’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다.  


엊그제 ‘1984’를 도서관에서 빌려 다시 읽었다. 소설 전반을 통해 여러 번 등장하는 ‘이중사고(doublethink)’라는 개념이 인상적이었다. ‘이중사고’는 모순된 개념을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주체적인 사고를 막고 권력의 주장을 흡수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인간 사고방식의 개조 메커니즘이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란 당(권력)의 강령은 비논리적인 개념이지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도록 강요된다. 그렇게 주입된 개념은 ‘제정신’을 앗아가 버린다. 소설 속 문구를 빌려오면 다음과 같다. ‘만일 사람들이 당의 거짓말을 믿는다면 - 그리고 모든 기록들이 그렇게 되어 있다면 - 그 거짓말은 역사가 되고 진실이 되는 것이다.’ 


연립정부, 대연정, 보수단일화, 빅텐트…. 벌써부터 대선주자들의 말 잔치다. 당연하다. 선거는 ‘언어를 통한’ 민주 절차니까. 그러나 여기에 ‘대안적 사실’이나 ‘이중사고’가 끼어들면 곤란하다. 거짓말이나 허구에 불과한 수사(修辭)가 교묘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정치적 프로파간다’ 행세를 하게 해선 안 된다. 벌써부터 우리는 표를 의식한 모호하고 이중적인 언어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좌파 신자유주의’라거나 ‘진보적 보수’와 같은 단어들은 어떤가. 한 번에 와 닿지 않는 이런 애매한 개념들이 사람들의 판단을 흐려놓는다. 두 패러다임의 장점만 뽑아 새로운 하나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처럼 늘어놓지만 혼란만 가중할 뿐이다. 게다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류의 정책과 태도 발언이 나올지 모를 일이다.


‘그는 빅 브러더를 사랑했다.’ ‘1984’의 마지막 문장이다. 발버둥을 치다 결국 ‘사상개조’된 주인공의 처참한 실패다. 그래서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dystopia)의 거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새겨야 할 구절은 따로 있다.


만약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 계급에 있다. 왜냐하면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소외된 대중 속에서 당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원칙 없고 비겁한 용어로 위장한 이들을 심판할 우리의 권리와 책임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1984’가 2017년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여기서 읽어야 한다. 



          김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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