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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승빈 Jan 20. 2021

지도라는 틀 안에 갇혀버린 여행

1월 20일. 스무 번째.

호안끼엠 호숫가의 여행자센터에서 준 지도를 들고 하노이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여행이 지도라는 틀 안에 갇혀버린 것 같아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졌다. 영화 트루먼쇼의 짐 캐리가 자신이 사는 영화 세트장을 세상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처럼, 나는 지도가 보여주는 한정된 모습을 하노이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도에서 잘려나간 홍강의 건너편을 가보기로 했다.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롱비엔 철교에 다다랐다. 당장 무너져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녹슬고 부서진 다리. 이 다리는 프랑스 식민시절 북베트남의 통제를 위한 전략적인 목적으로 건립되었고, 베트남 전쟁 때는 하노이와 주요 항구인 하이퐁 Haiphong을 잇는 유일한 다리로써, 그 중요한 위치 때문에 미군에 의해 폭격되었다. 수리와 파괴를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근대 베트남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다리다. 새로 지어진 다리들 때문에 노후된 롱비엔 철교는 이제 기차, 오토바이, 자전거와 보행자만이 이 낡은 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에펠탑을 만든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다리라는 소문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파리의 에펠탑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철교 가장자리의 보도는 한 사람이 걷기에도 좁다. 게다가 빠르게 지나는 오토바이들로 구름다리처럼 쉴 새 없이 흔들거렸다. 앙상하게 남은 철제 구조물은 빨갛게 부식되어 금세라도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스치듯 달리는 오토바이에 머리칼은 흩날리고, 행여나 옷자락이 걸려 사고가 나지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보행자의 안전을 위한 난간은 애초부터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지, 간격이 너무 넓어 위험해 보였다. 깨진 보도 사이로 아찔하게 내려다 보이는 다리 아래는 바나나 농장과 옥수수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저 이 낡고 오래된 다리는 홍강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한 여러 길목 중 하나일 뿐이었다. 위험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걷는 동안 건너편의 풍경보다도 이 다리에 온통 관심이 쏠렸다. 한참 걸은 것 같은데도 다리의 끝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전에 다리를 건너고 싶었지만, 해는 금세 수평선에 닿아 노랑과 보랏빛이 섞인 하늘을 만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기대어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발아래에는 어둠에 반사된 보랏빛의 홍강이 멈춘 듯이 천천히,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잔잔한 바람이 이따금 머리칼을 흔들며 지나갔다. 멀리 바라보이는 쯔엉쯔엉교는 오가는 차량과 오토바이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반짝거린다. 적당히 따뜻한 온도, 시원한 바람.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알 수 없는 아련함. 이때부터 롱비엔 철교는 내가 하노이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오토바이를 빌려 다시 롱비엔 철교로 향했다. 수많은 오토바이 틈에 끼어 그들처럼 시끄러운 소음을 멀리 울리며 홍강을 향해 달렸다. 조금은 그들의 삶에 다가간 것 같은 기분. 철교의 초입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짧은 망중한을 즐긴다. 어제 보랏빛으로 흐르던 홍강은 본래의 색을 띠며 흘렀고, 부식되어 거칠거칠한 철재 구조물은 아침 햇빛에 데워져 따뜻하다. 어제 불안하게 했던 흔들거림은 마치 이 철교가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다시 오토바이의 키를 돌려 시동을 걸고는 1680m의 롱비엔 철교 위를 힘차게 따라 달렸다. 달리는 속도에 시야는 좁아지고, 주변의 많은 것들이 찰나처럼 스쳐 지났다. 홍강 건너편의 수많은 바람이 오토바이의 앞을 막아서듯 세차게 온몸을 밀어대었다. 짐 캐리의 배가 세트장의 벽에 부딪혀 마침내 그가 그곳을 탈출한 것처럼, 어느새 나는 지도 바깥을 달리고 있었다.






하루 한 장의 드로잉, 하나의 단상.

1장 1단. 스무 번째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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