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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승빈 Jan 25. 2021

조금은 더 인간미가 느껴지는 쪽

스물두 번째.


나는 그날의 버스가 몇 번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티켓과 영수증들을 모아 둔 여행 노트를 펼쳐 본다면 분명 기억이 나겠지만, 애써 그것을 들추어 볼 정도로 대단치 않은 이야기이므로. 그저, 문득 떠오른 그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오스트리아 빈 국제공항에서 부다페스트로 가기 위해 다시 작은 비행기로 갈아탔다. 국경을 넘나드는 비행기였음에도 승객은 30명도 채 되지 않아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고속버스를 탄 느낌이 들었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해 공항을 나오니 시간은 밤 9시 30분을 넘었고, 빈 국제공항에서 본 먹구름이 이제야 여기에 도착했는지 내리는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님에도 공항의 보안요원도 전혀 보이질 않았고, 주변의 가게들도 모두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같은 비행기를 탄, 몇 되지도 않던 사람들은 미니버스를 타고 금세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아무도 없는 시골의 버스터미널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기분. 몇 푼 아껴보고자 미니버스를 애써 외면하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처음 와보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정류장에서 홀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늦은 시간, 비도 내리고 우산도 없는데 그냥 미니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갈걸 그랬나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던 중, 멀리 한 남자가 커다란 트렁크를 끌며 정류장으로 걸어왔다. 


볏짚 같은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진 노란 중절모에 검정 뿔테 안경, 핑크색 폴로 티셔츠, 얼굴에는 면도를 하지 않아 거칠게 난 수염이 양볼을 가득 덮고 있었다. 한참 동안 나란히 서있기 무안했는지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자신은 튀니지아에서 의대를 다니고 있고, 
교환학생으로 부다페스트에 방금 도착했다고 했다.  튀지니아라는 말에 나는 무심코 "오! 아프리카"라고 말했었는데, 순간 그의 표정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튀지니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나라라는 정도. 어쩌면 그에게는 자신의 나라가 아프리카로 불리는 걸 싫어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외국인에게 Korea라 했을 때 상대방이 North Korea로 이해했을 때의 그런 당황스러움 정도일까. 하지만 어차피 그도 한국이란 나라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의 이름을 몰랐고, 그도 나의 이름을 몰랐다. 하지만 둘 다 부다페스트가 초행인 데다가 목적지가 어느 정도 겹친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다. 버스에 올라 지도를 펼치고 서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재차 확인을 했다. 창밖으로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에 버스 안은 적당히 시끄러워서, 다행히 서로 말이 없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손으로 비를 막으며 나란히 전철역까지 뛰었다.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교환학생으로 가는 학교의 같은 의대생들을 만났고, 그는 내게 '잠깐만'이라는 말을 남기고, 그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멀리서 눈인사 조차 주고받지 못한 채 헤어졌다. 부다페스트의 야간 전철은 촛불을 켜 놓은 것처럼 실내가 무척 어둡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작별의 눈인사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에게도 그에게도 조금은 더 인간미가 느껴지는 쪽이니까. 


때때로 우리는 동행이란 말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우정이나 사랑 혹은 자격이나 조건이 내포되어야만 하는. 동행이란 그저 같이 길을 가는 것, 어쩌면 단지 그것뿐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루 한 장의 드로잉, 하나의 단상.

1장 1단. 스물두 번째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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