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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Jul 04. 2024

정면승부

정면승부. 이 단어를 들으면 무슨 감정이 드는가? 나는 두려움이 앞선다. 왜 두려울까? 무언가에 정면으로 맞섰을 때 나의 보잘것없음이 탄로날까봐 그런 것이다. 그 말은 내가 그만큼 많은 것을 가졌으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내가 가진 것이 많고, 그것을 진실된 나로써 얻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나의 진짜 실력이 드러날까봐. 나의 민낯이 드러날까봐. 나의 진심이 드러날까봐. 화장하지 않은 나의 모습이 드러날까봐.


꽤 자주 당황스러운 일들을 겪는다. 나의 외모만으로 사람들이 나를 호감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학교를 다닐 때에도 직장에서도 취미활동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학교를 다닐 때에는 똘똘해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고 직장 내에서는 묵묵하다는 소리를 듣고 취미활동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에게 신뢰의 눈초리를 보낼 때가 많다. 나의 업무 특성상 회사를 대표해서 거래처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큰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거나 통역을 할 일이 많다. 나는 말주변이 없고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참 우습게도 그런 자리에서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많이 받곤 한다. 그러면 나는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나는 입으로만 나불대며 소비자를 등쳐먹는 장사꾼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실제로 내가 설명하는 대상에 대해 관심도 없고 자세히 알지도 못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Q&A 세션이 가장 두려운 것이다. 더 끔찍한 것은 이제는 능구렁이처럼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포장하거나 눈하나 깜짝 안하면서 거짓말을 늘어놓는 스킬이 늘어간다는 사실이다. 어떤 몸짓으로 어떤 톤으로 이야기 하면 되는지, 어떻게 사람들을 적당히 웃기며 이야기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호감을 살 수 있는지 등등을 조금씩 알 것 같을 때, 나 스스로가 정말 싫다. 


내가 생각하기에 회사에서 정면승부를 하는 부서는 영업부이다. 영업사원들의 경우에는 판매 실적이 고스란히 그들의 평가 지표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객들을 가장 일선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컴플레인을 받는 사람도 영업사원이다. 리스크가 가장 큰 일을 하기 때문에 성과금도 가장 많이 받는다. 그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정말 미안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은근슬쩍 업무를 미룰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들이 요청하는 자료를 최대한 준비하려 하고 마음이 가는 사람들에게는 궃은 일도 내가 함께 짊어지려 하지만 어쨌든 전쟁터에 나가서 전선 최전방에서 적을 맞이하는 것은 영업사원들이다. 사장이 몇 번이고 거래처를 맡을 것을 제안했지만 나는 번번히 거절했다.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 아니면 회사에서 그만큼의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은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후자라고 생각하며 자기위로를 했지만 그렇기엔 내가 혼을 담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하는 그 무엇이 나에겐 없었다. 그랬다. 나는 정면승부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뜻은 사실은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참 역설적이게도, 나는 회사 생활을 잘하고 있다. 정확히는 나의 인사권자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 '일을 잘한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나의 업무는 영업사원들의 기술적 및 학술적 지원, 전반적인 마케팅 업무, 세미나 및 학회 기획, 실험 설계 및 데이터 수집, 본사와 한국 지사간의 소통, 신제품 로컬화, 프리믹스 제품 포뮬레이션, 제품 허가 및 등록 등이 주 업무이다. 전세계 규모로 보자면 덩치가 큰 회사이지만 한국 지사는 직원수도 적고 한 사람의 업무 로드가 꽤 막중한 편이다. 물론 다국적 기업이기 때문에 신제품 자체를 개발해야 하는 경우는 없지만, 수많은 제품 포트폴리오 중에서 한국 실정에 맞는 기능성 첨가제 조합을 축종별로 적절히 개발해야 한다. 이런 업무들을 정말 '진심으로' '혼을 담아서' 하려면 막대한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적당히' 한다. 거짓이 아니라 정말로 '적당히' 해서, 기억도 못하고 업무 관련 자료가 담겨 있는 노트북이 없으면 제품 하나에 대해서 정말 실속있게 설명하지도 못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척' 을 잘 한다. 내가 해야하는 '일' 이라는 것의 알맹이와 나 사이에는 실로 그 폭이 어마어마한 강이 흐르고 있다. 건널 수 없는 강. 아니, 건널 수 없는 강인지 내가 배가 불러서 건너지 않아도 되는 강인지 모르겠다.


친구들 중에 정말 힘든 업무 환경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보면 나는 정말 편하게 일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힘들다는 말이 쏙 들어간다.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하더라도, 왔다 갔다하는 액수가 큰 프로젝트를 하더라도, 장거리나 해외 출장이 잦더라도, 아무리 몸과 마음이 힘들어도 그건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정해진 운동장 트랙을 돌 때의 힘듦이라는 사실을 안다. 즉 이런거다. 지금 당장 쉬지 않고 버피 1000개를 하면 죽을 것 같이 힘들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나는 안락한 집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고, 시간은 고작해야 한두시간 흘렀을 뿐이고, 나의 안위는 너무나 무사하다. 내가 겪는 힘듦은 그런 힘듦이다. 진짜 정면승부 해야하는 사람들의 무게는 나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밥벌이에서도 그러한데 그 밥벌이 중에서도 나는 진검승부를 늘 피하고 있다. 


최근 우리 회사에서 나름대로 진검승부라고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맡았지만, 그마저도 진검승부라 할 수 없었다. 제품력으로 이미 인정을 받은 제품이고 우리 제품말고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업계에서도 암묵적으로 프로젝트 성사에 힘을 실어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역량 이상의 책임과 역할이 부여 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열심히 했지만, 최선을 다하진 않았다는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정도까지 뼈와 피와 영혼을 갈아넣지 않아도 나는 적당히 인정 받을 수 있고 회사를 무난히 다닐 수 있으리란 것을 영악한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참 타고난 정치꾼이다. '일을 잘한다' 는 것의 측면에서 보면 나의 재능은 이런 것일테다. 티나지 않게 시류에 편승하기. 갈등을 만들지 않고 모두와 원만하게 지내기. 실세를 파악하고 라인 잘타기 등등. 이 중에 정말 나의 실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물론 혹자가 보면 이것 역시 나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나의 모습을 부정하기 때문에 더 큰 불행을 몰고 오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없는 것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하는데 아직 나는 너무나 나약하다.


나를 긍정하려면, 없는 것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려면, 타인을 질투하지 않으려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 나에게 정말로 자연스러운 것에 혼을 갈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넣어야 한다. 

작지만 그런 경험이 내게는 있다. 나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겠지만, 복싱 생체 시합을 나갔을 때 그랬다. 그 때가 내가 유일하게 혼을 다해 정면승부 했을 때였다. 사실 더 할 수 있던게 아니었을까 그 때조차 도망쳤던게 아니었을까 하는 무수한 복기들이 있었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 때의 나에겐 그게 최선이었다.

그 때, 처음으로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부럽지 않았고 잠시나마 나의 존재가 부끄럽지 않았고 처음으로 내가 두 발을 지면에 붙이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에겐 그런 것이 없다. 


나는 뭔가를 하더라도 '열심히' 할 뿐 '잘' 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 마케팅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는 것도 안다. 퇴사를 고민하는 지금, 정말 퇴사를 하게 된다면, 그 때야말로 진실로 나의 실력으로 진검승부를 펼쳐야 할 때가 다가오리라는 것을 안다. 아니 알지 못할 것이다. 나에겐 그런 경험이 미미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면승부를 하고 싶다. 세상과 맞짱을 뜨고 싶다. 억척스러운 내가 징글맞다. 가슴에 불을 활활 당겨 놓는 고통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꺾이는 무릎을 세우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가지런히 하고 굽어지는 허리를 곧추 세운다. 깃발을 저 멀리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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