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보경 Jul 08. 2024

좋아하는 것을 소중히 대하는 법

"나는 xx를 좋아한다"


이 문장을 치고 가만히 바라본다. 이 짧은 문장이 몰고 오는 세찬 여운을 느끼면서. 이 단신의 문장이 얼마나 길고 짙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지 일종의 경외감마저 든다.


복싱을 시작한 지 2년이 되었다. 나는 복싱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일까? 지난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나마 꾸준히 한 것이 있다면 그건 운동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 가령 해외 출장이라던지 늦은 시간에 끝나는 야근이라던지 중요한 약속이라던지 - 이 아니고서는 매일 꼬박꼬박 체육관에 가서 2-3시간은 운동을 했다. 어쩌다 퇴근이 늦어지더라도 가능하다면 한 시간이라도 운동을 하기 위해 시간을 만들어냈다. 토요일에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율 운동을 2-3시간씩 하는 스케쥴을 지켰다.


어쩌다보니 복싱과 주짓수를 병행하게 되어서 체육관을 3개 다니는 형국을 1년 이상 지속하게 되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하루에 두 개의 운동을 체육관을 이동해가면서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직장에서 연차가 쌓이면서 한창 업무가 과중해지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때 당시에는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과거 경험을 통해 쌓아왔던 나의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운동을 하면 건강해지고 활력이 생긴다' ‘운동을 통해 마음의 고됨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운동을 해도 건강해지지 않고 활력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고. 오히려 반대일 수 있다고. 지난 2년동안 감기를 그렇게도 자주 걸렸다. 운동을 과하게 하면 면역력이 떨어져 오히려 잔병치레가 잦아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주짓수를 하면서 인대가 찢어지거나 관절이 꺾이거나 하면서 부상이 시작되었고 복싱을 하면서 그 부상 입은 곳이 덧나 만성 통증으로 이어졌다. 복싱과 격투기 자세 특성상 어깨가 안으로 굽는 자세가 많다. 굽은 자세를 오래 유지한 탓인지 어깨와 목 그리고 경추가 뻣뻣해지고 어깨 통증을 달고 지내게 되었다. 어느 날은 왼쪽 손끝부터 목까지 저릿저릿한 저림과 함께 감각이 없어지는 증상이 하루종일 지속되기도 했다.


얼마 전 복싱 생활체육지도자 2급 시험을 봤다. 복싱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분량이 제법 되는 필기시험과 지도자로써의 역량이 필요한 실기시험을 준비하는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나는 '이 시험을 왜 보려고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해결이 되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갔다.


지도자의 자질은 무엇일까. 분명 내가 지도하고 싶은 것을 진심으로 좋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배우는 사람이 나로 하여금 복싱을 좋아하게 되고 조금 더 건강하고 씩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도자에겐 있어야 할 것이다. 지도자의 길에는 이렇게나 촘촘하게 무수한 혹들이 솟아 있다. 그리고 간편한 복장으로 순진하게 나섰던 나는 번번히 걸려 넘어졌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크게 걸려 넘어졌던 곳은 첫번째 봉우리인 '나는 복싱을 진심으로 좋아하는가?' 였다.


분명히 복싱을 순수하게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 때에는 체육관 가는 것이 즐거웠고 혼자서 쉐도우 하는 것도 말없이 샌드백 치는 것도 매번 떨리기는 해도 링에 올라가서 매스나 스파링을 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체육관에 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단순히 스파링을 할 때 맞고 때리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다. 그건 늘 두려웠던거라 괜찮았다. 내가 진짜 두려웠던 것은 '오늘도 피곤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체육관에 가서 최선을 다해 쥐어 짜내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정언명령같은 명제였다.


'최선을 다해서 쥐어 짜낼 것'. '포기하지 말 것'. '내가 두려운 지점에서 물러서지 않고 한 발자국이라도 넘어설 것'. 늘 도망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을까. 정작 도망치지 말아야 할 곳에서는 도망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한 때 좋아했던 운동은 나에게 고통스러운 고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쉐도우를 할 때에도 매스 스파링을 할 때에도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고 실력은 더 이상 늘지 않았다. 운동을 하면 할수록 활력이 떨어지고 우울해지는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


복싱이나 주짓수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다 보면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주고 받게 될 때가 많다. 그래서 건전하고 바람직한 체육관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좋은 체육관이 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운동을 고행처럼 하게 되자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런 나의 마음을 종종 느끼곤 했다. 그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미안하다. 사람들과 겨루는 운동을 하다보면 내가 얼마나 나만 생각하는지를 많이 느끼게 된다. 나는 격투기에 대해 하나도 모르지만, 적어도 격투기라는 운동은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되는게 아니라는 것은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생활체육지도사 자격증을 분기점으로 내가 왜 복싱에 대해 마음이 시들해 졌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좋아하는 대상을 소중히 대하지 못했구나. 그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그건 바로 '게걸스러움'과 '집착' 이었다.


한 때 복싱을 처음 만났을 때, 복싱을 좋아한다는 기쁨에 도취되어서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고 마셔댔다. 그래서 복싱에 대한 마음이 너무 쉽게 소진되어 버린 것이다. 복싱을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 식었을 때, 좋아했던 때의 기억을 놓지 못하고 집착했다. 그래서 복싱에 대한 마음을 오염시켜 버린 것이다.


좋아하는 만큼 좋아해야 한다.


이 사실이 참 시렸던 때가 있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가슴 깊이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될 까봐서였다. 그리고 한 때 좋아했던 것들이 내 마음에서 점점 잦아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시 나의 황량한 마음에 홀로 남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척 집착했다. 나는 복싱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다. '복싱을 좋아했던 나의 모습' 을 좋아했던 것이었다. 정직해져야 한다. 좋아하는 것을 소중히 대하려면, 반드시 좋아하는 만큼 좋아해야 한다.


과거의 나도 그랬다. 좋아하는 만큼 좋아하지 못했다. 드럼에 처음 빠졌을 때, 마치 첫사랑을 만난 것 같았지만 좋아하는만큼 좋아하지 못했다. 너무 빠져버리면 위험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 경제적으로 부유한 삶, 부모님에게 인정는 삶을 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우유부단하게 양다리를 걸치다가 마침내 사랑이 떠나갔을 때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오랜시간 동안 집착했다. 그렇게 나는 좋아하는 것을 소중히 대하지 못했다.


시험이 끝난 뒤 복싱 체육관을 2주동안 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은 당연히 있었다. 맞서야 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일까봐. 그러나 잠시 생각할 틈이 생기자 알았다. 나는 너무나 어리석었다는 것을. 내 삶을 이루는 많은 조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을 맞추지 않은 채로는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진실을 외면하려 해도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맞이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정직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좋아하는 것을 소중히 대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