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니 모레티, 2001
이탈리아의 작은 항구 마을에서 살고 있는 '지오반니'는 젊고 유능한 정신분석의다. 지오반니의 환자는 강박증자, 성도착증자, 대인관계 기피증자 등 여러가지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는 그런 그들의 고통을 들어주고 필요한 처방을 내려준다. 그에게는 소중한 가족이 있다. 온화하고 배려심 넘치는 아내 '파올라'와 건강하고 유쾌한 딸 '이레네', 그리고 내성적이고 따뜻한 마음씨의 아들 '안드레'. 여느 가족에게 그렇듯이 그의 가족에게도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생활을 이어간다. 지오반니의 세상은 안과 밖 모두에서 큰 문제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아들이 죽음을 맞이한다. 주말 어느 날, 친구들과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지오반니는 자신을 자책한다. 그 날 지오반니는 아들과 함께 조깅을 하러 가려다가 급하게 걸려온 환자의 전화에 아들과의 약속을 미루고 환자를 살펴보러 갔던 것이다. 그는 그 때 아들과 함께 조깅을 하러 갔더라면 아들이 죽지 않았을거라며 자책한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안드레의 마음을 놓쳤다. 왜 친구와 암모나이트를 훔쳤는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왜 경기에서 경쟁적으로 임하지 않았는지, 어떤 노래를 좋아했는지, 첫사랑은 누구인지, 그리고 스쿠버다이빙에 대하여. 안드레가 죽기 전까지, 지오반니는 자신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치료해주는 정신분석의였으니까. 그러나 안드레가 죽자 그는 그가 안드레의 마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면 남탓을 하거나 외면하고 싶어진다. 누구나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처럼 미성숙한 사람들은 그렇다. 지오반니는 안드레가 좋아했던 '아리안나'가 오래 전 안드레에게 보내왔던 편지에 답장을 쓰지 못한다. 그 아이를 만나보자는 아내의 부탁에도 만나지 못한다.
안드레의 죽음은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날벼락처럼 덮친 사고같은 불행이었다. 지오반니는 정말로 안드레를 사랑했기에 고통을 외면만 하지는 못한다. 지오반니는 사고가 난 날 그에게 전화를 했던 환자나 스쿠버 장비를 탓하고만 싶다. 미사에서 "도둑이 찾아올 것을 알고 있다면 결코 당하지 않는다"는 신부의 말에 분노한다. 그리고 자책한다. '그 날 안드레와 조깅을 하러 나갔더라면 안드레가 죽지 않았을텐데' 라는 후회와 함께 이루어지지 않은 장면을 상상한다.
지오반니는 더 이상 정신분석 상담을 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늘 환자들을 객관적이고 차갑게 분석하며 치료하려고만 했던 지오반니였다. 자신에게 큰 불행이 덮치자 지오반니는 더 이상 환자들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없다. 자신의 고통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환자들의 고통이 그에게 밀려들어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 일을 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고통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바로 그것이 안드레의 마음을 놓친 이유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온가족이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파괴되어가던 중, 어느 날 안드레의 첫사랑 아리안나가 지오반니의 집에 불쑥 찾아온다. 지오반니는 아리안나와 이야기를 하고 그녀가 전해 준 안드레의 사진을 본다. 그리고 아내와 딸과 함께 여행을 하는 아리안나와 그녀의 남자친구를 차로 태워준다. 히치하이킹으로 여행 중이라는 아리안나와 남자친구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가까운 작은 휴게소에 내려 주었다가, 이내 마음을 바꿔 더 큰 휴게소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차를 돌린다. 그러다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아이들을 보고 지오반니와 아내는 밤을 새워 프랑스 국경까지 달린다. 함께 점심을 먹고 아리안나 일행은 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지오반니 가족은 해변 모래사장에서 각자 다른 곳을 향해 걸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고통은 개별적이기에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몫이 있다. 그 고통을 누군가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고통은 치유될 수 있다. - 황진규
올해 말부터 시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보다 성숙한 친구들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미뤄뒀던 영화와 책과 글들을 읽으며 감정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꽤 오랜 기간동안 내 몸과 마음이 딱딱해져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고통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내가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몫의 고통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배웠기에 고통의 시간이 찾아오면 운동을 하고 혼자 견뎌 보려고 했다. 걱정스러워하는 친구를 밀어내고 동굴로 들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내 고통이 잦아들면 너를 만나려 했다. 그렇게하면 내 몫의 고통을 감당하고 네 몫의 고통까지도 함께 짊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몫의 고통을 혼자 감당하는 것이 때때로 점점 더 버거워지는 것만 같았고 이 세상에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친구의 고통이 나에게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을때도 많았다. 나의 진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서운하고 섭섭하고 때론 억울할때도 있었다. 급기야 친구가 가장 힘들어할 때 친구의 고통을 함께 느끼기는커녕 쌓아왔던 자기연민이 터져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진정한 우정이란 나의 문제를 '회피'하게 하는 것도 '의존'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우정과 도움은 '회피'와 '의존' 사이에 존재한다. 나는 그동안 친구라고 불리어왔던 친구들에게 극단적인 '회피'와 '의존' 으로 대했던 적이 많았다. 피상적으로 친하거나 나보다 약해 보이는 친구들에게는 '회피'를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거나 가벼운 이야기만 나눴다. 나보다 강해보이는 친구들에게는 '의존'을 했다.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것을 요구하며 징징거리고 매달리기에 바빴다.
그랬던 친구들 모두가 지쳐서 떠나갔다. 나는 다시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다. 강한사람이 되고 싶었던 약한 나에게는 결국 모두에게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었다. 친구가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줄수록 나는 회피를 했다. 나의 모든 것을 받아줄 것처럼 하다가 언젠가 나를 버리고 떠날 것 같았기에. 그를 믿었다가는 언젠가 버림받을 것 같았기에.
혼자 견뎌보겠다고 동굴로 들어갔던 시간들은 그저 나의 강한척이었다. 진짜 강함은 유연함이다. 나는 유연함과는 거리가 먼 뻣뻣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친구의 고통 앞에서 나는 그것을 함께 느끼기는커녕 이성적인 해결책을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친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상처를 주고 말았다. 진짜 고통일수록 그 골이 깊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민은 그로부터의 변주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친구의 고통 앞에서 지친 티를 내고 차갑게 감정의 차단막을 내리고 강인한 척 조언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지오반니가 되어가고 있었다.
친구들의 도움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다' 라는 믿음이 우리를 돕는다. - 「단장」, 에피쿠로스
나에게는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주제가 있었다. 나는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싫었다. 이기심의 끝에 이타심이 있다는 말도 싫었다. 모든 이타적인 사랑의 근본에는 '나'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고귀하고 숭고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너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기에 너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나는 여기서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의 마음상태는 이랬다. "나를 위한건줄 알았는데 사실은 너를 위한 것이었단 말이야?"
이전까지는 그저 '사랑 받고만 싶어하는 유아적인 내 모습'을 자책하고 스스로 질타하는데에서 그치고 말았었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수업과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 수업을 들으면서 생각해보았다. 모든 생명체의 절대적인 조건은 '몸' 이며,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들의 근본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사실조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까? 왜 그마저도 회의적이고 염세적으로 바라보았을까?
여행을 다녀왔다. 그림을 보러 프랑스에. 그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보러 폴란드에. 여행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다. 감정적으로 힘든 일도 함께 겪으면서 빡센 직장 일정 때문에 여행 직전까지도 고된 하루를 보내고 온 친구는 결국 몸살이 났다. 그와중에도 친구는 자신 때문에 힘들 나를 걱정했고 내가 아픈 것을 걱정했다. 그런 와중에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나를 위한 편지를 써 주었다. 편지에 쓰인 말들이 꾹꾹 담겨져 친구의 눈짓하나 표정하나 나에게 해주는 말 하나하나가 되어 흘러 들어왔다.
지난 수업들 중 등장했던 화두가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어떻게 유익한 존재가 될 것인가?. 친구는 늘 자신이 나에게 유용하지 않다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스승이 직장을 그만두고 친구와 함께 올랐던 등산길이 누구에게도 받지 못했던 '도움' 이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친구와 함께 떠났던 여행이 누구에게도 받지 못했던 '도움'이었다. 유용함이었다. 친구는 산을 오르는 동안 단 한번도 나에게 도움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나를 도와주어야 하나' 라는 생각만 했다.
친구는 늘 말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서 있을게. 네가 무엇을 하고, 어디에 다녀오고, 누굴 만나고 오든 마지막에 네가 서 있는 곳 옆에 내가 있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에 있을게. ” 그들의 말을 믿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같은 말을 해줄 수 없어서였다. 내가 너를 믿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어떤 곤경에 처하더라도 도움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도와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를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불편했던 이유는 결국 내가 유용한 존재가 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너에게 정말 유용한 사람이 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없다는 것은 결국 내가 상처받을것이 더 두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건 정말 바보같은 머뭇거림이다. 진심으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유용함을 짜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까. 친구들이 나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친구가 나에게 먼저 보여줬던 용기와 진심 덕분에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진심으로 대하려고 해 보았다. 가진게 없는 나지만 너의 고통을 함께 해 주는것이 나의 유일한 유용함이라면. 친구에게 도움을 받고 친구를 믿는 것과 친구의 고통이 진심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 둘 중에 어떤 것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겪어본 고통보다 훨씬 크고 다른 종류의 고통에 가끔 짓눌리고 숨 쉬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너를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는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 사람이 기뻐하는게 나에게도 기쁨이구나.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는게 나에게도 고통이고 슬픔이구나. 진심으로 사랑을 받아보고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고 애써보고 나니 알겠다. 친구가 나에게 “내가 힘든 것보다 네가 힘든게 더 아파. 그래서 나는 항상 괜찮다고 말하게 돼” 라고 말해주었을 때 마음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상대방 역시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건지,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게 어떤건지 몰랐다. 내가 만들어낸 파동에 네가 반응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네가 만들어낸 파동에 내가 반응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너'가 곧 '나'이고 '나'가 '너'라는 것을 몰랐다. 우리는 몸을 가졌기에 시작점이 '나'일수밖에 없고 '나'와 '너'는 같기에 결국 '너'를 위하는 것이 '나' 를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진심이 담긴 사랑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걸 받아서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사랑해보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머리로 차갑게 생각만 해서는 절대로 몰랐을 마음들이었다.
고통은 개별적이기에 자신이 감당해야하는 고통의 몫이 있다. 그 고통을 누군가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고통은 치유된다. 고통을 '직면' 한다는 것은 나의 고통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동시에 나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그 부채감을 죄책감이나 자책으로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꾹꾹 한톨한톨 다져 삼켜가며 견디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 속으로 깊이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안드레에게 유용한 사람이 될 기회조차 잃었던 지오반니는 안드레의 첫사랑 아리안나를 차로 태워 국경선까지 데려다주게 된다. 그렇게 진정한 애도를 하고 아리안나와 그의 아내와 딸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준다. 동시에 그의 마음 역시 치유받는다. 안드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놓쳤던 안드레의 마음의 조각을 찾아 진심을 담아 소중하게 어루만져줌으로써 지오반니는 구원받는다.
요즘 사라지고 떠나간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는 일이 부쩍 늘었다. 나는 죽음을 경험해 본적이 많지 않다. 그리고 그 상실이 깊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순간 슬펐던 적은 있었을지라도 그 슬픔이 너무 커질 것 같을때면 쉽게 덮어둘 수 있을 정도였다. 지오반니처럼 너무나 사랑했기에 고통을 회피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던 대상이 없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가까운 죽음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우리 할머니와 외할머니이다. 엄마와 아빠는 각자 자신의 어머니께 최선을 다해 드리고 있다. 요즘들어 엄마가 예전에 나에게 귀에 박히도록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난다. 내가 부모님 말을 듣지 않을 때면 엄마는 늘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 그러다가 부모 죽으면 그 때가서 후회하려고 그래?"
그 때 당시에는 그 말이 그렇게도 듣기 싫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엄마는 몸이 약하고 자주 아팠기 때문에 나는 아픈 엄마 곁에 있는게 힘들고 싫었다. 엄마가 하는 저 말이 마치 엄마의 생명을 볼모로 나에게 협박을 하는 것처럼 들렸던 적도 있었을만큼 나는 철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엄마의 말이 마음 한 구석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떠나가고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애도하는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읽고, 그 장소에 가보면서 계속 엄마의 말이 귓가에 떠돌았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떠나간다면. 철없던 시절 나는 그런 상상을 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다면 너무나 후회되고 마음이 아플 것 같다. 그저 조바심만 들고 절박함이라고 하기에도 가벼운 불안에 휘청거렸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지. 그리고 그 너머에 뒤안으로 미뤄두었던 묵은 고민이 따라붙었다.
혼자 남겨질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는 언젠가 헤어지고 떠나가고 사라질 것이다. 죽음이라는 사건, 이별이라는 사건은, 결국 너와 내가 홀로 남겨지는 것이다. 내가 떠나든 네가 떠나든 홀로 남겨지는 것. 아무도 대신 짊어져 줄 수 없는 고독의 공포 속에 남겨지는 것.
그러자 '엄마가 나에게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후회의 고통에 남겨지길 원하지 않을것이다. 지금 엄마는 그 고통 속에 있으니까, 그래서 더 이상은 그 후회의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외할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외할머니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의 마디마디를 함께 하고 있으니까. 나는 '혼자 남겨질 너' 의 고통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의 말이 나를 위한 안타까운 외침으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죽음에 혼자 남겨질 할머니와 외할머니를 걱정하는, 그리고 철없이 구는 내가 언젠가 혼자 남겨질 것을 걱정하는 엄마와 아빠의 마음을 알까. 언젠가 혼자가 될 우리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너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이별을 사라짐을, 그리고 나의 사라짐을 나는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가.
너무 늦기 전에 너와 함께 조깅을 하러 가고 싶다. 너무 늦기 전에 너의 소중한 존재를 태우고 조심스럽게 밤을 새워 운전해주고 싶다. 너의 사랑으로 나의 고통을 치유한 뒤에 나 역시 소중한 너의 고통을 함께 아파해주고 싶다. 그리하여 너 역시도 후회의 고통을 겪지 않게 하고 싶다.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이제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사랑해줘. 나를 믿어줘. 나를 소중히 대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