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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열 Nov 01. 2020

노량진 육교가 없어졌다.

어느덧 직장인 2년 차

약간 과식한 듯 점심을 먹고 배부를 배를 내밀며 미끄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스마트폰 스크롤을 내리다 우연히 시선이 멈춘 곳의 기사는 노량진 육교가 곧 철거된다고 했다. 분명 가볍게 읽던 기산데 갑자기 어떤 한 덩어리가 내 가슴으로 쿵 내려앉는다.


노량진 육교가 없어지는구나.

사실 그렇다. 이렇게 마음이 걸릴 만큼 노량진 육교에 커다란 어떤 의미를 두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노량진 육교와의 인연이라고 해 봤자 10여 년 전 재수학원을 1년 정도 다니며 거의 매일 지나갔던 것뿐이었다. 그곳을 매일같이 지나갈 때도 그리고 지난 10여 년 동안 이 곳을 한 번도 아련하게 떠올린다거나 의미 있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재수 친구와 가끔씩 재수학원을 떠올리며 긴 통화를 할 때도 유가네 닭갈비라든지, 양말가게 와플이나 이미 한참 전에 문을 닫은 삼계탕 집 ‘어가장’처럼 노량진 곳곳을 추억하며 이야기하면서도 한 번도 육교는 떠올리지 않았던 곳이다.

그런데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괜히 서글퍼지다 한 번도 떠올리지 않던 기억들이 추억이 되어 올라온다.


2004년 2월, 학원을 등록하기 위해 처음 노량진 역에 내렸을 때 찬바람과 함께 밀려온 비릿한 냄새가 불었다. 그렇게 시작한 재수생활,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 야자를 했고 육교 아래 포장마차에서 ‘떡, 튀, 순’을 먹으며 수없이 ‘대학에 가면’이라는 말을 붙이며 내년 신입생의 추억을 미리 상상했다.  넉넉하게 담아준 분식을 다 먹고는 함께 지하철을 타는 친구들과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 육교 계단을 올랐다. 멀리 전철이 들어오면서 육교가 살짝 흔들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익숙한 듯 오르지 않는 성적을 고민하며 쉼 없이 재잘댔다. 지나고 보니 육교만큼이나 떨리는 20살을 건너던 시간이구나.


이런저런 생각이 며칠 마음속에 맴돌더니 결국 어느 일요일 오후, 노량진 가는 지하철에 올랐다. 스케치북과 펜을 들고. 그리고 여행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육교에 앉아 그림을 그리려다 조금은 민망한 마음에 육교와 역이 한눈에 들여다 보이는 카페 창가에 앉아 펜을 열었다. 마침 가깝게 붙어있던 옆 테이블에 앉은 한 여자도 맥북과 태블릿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 말이라도 걸어 볼까 하다가 역시 ‘여긴 서울이지’라는 생각에 마음을 접는다.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여행 나가서 말고 일부러 그림을 그리러 나온 적이 있었던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답은 역시 ‘이번이 처음이구나.’였다. 얼마 전 회사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엊그제 피아노를 쳤어요.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의미 없이 무언가 해본 게 참 오랜만이구나. 무의미하게 어떤 일을 한다는 것. 그래서 기분이 꽤 좋았어요.”

일상도 여행같이 산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스케치북을 들고 나오니 짧은 여행을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것이 일상의 소소한 여행일까? 

삶의 타협인지 순응인지 혹은 이제야 진정한 여행에 대한 대단한 의미를 찾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여행하지 않는 나날들이 어떤 중독자의 금단 현상처럼 힘겹지 않다. 반복되는 지루함도 싫지만은 않고 약간의 스트레스도 나쁘지 않다. 여행처럼 큰 자극은 없지만 가끔 소소하게 퇴근 후 마시는 맥주 반 잔도 나름 충분히 기분이 좋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 혼자 스케치북을 들고 나와야겠다. 여행하듯. 여행하듯.



육교가 없어지기 직전, 육교를 추억하기 위해 육교 위에서 그린 그림.







오래전 여행을 하고 몇 년 동안 글을 쓰고 사진을 다듬고 몇 해 전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쓰기 전에 책에 실은 글 중 좋아하는 글, 편집 과정 중 빠진 글, 사진이나 그림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페이지를 중심으로 다시 올려보려 합니다.

책을 봐주신 분들께는 다시 여행을 떠올리는 계기로, 아직 본 적이 없으신 분께는 답답한 일상에서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Instgram: @310.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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