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한다고 상처가 아무나요
미움받을 수 있는 용기 말고 맘 편히 미워할 수 있는 용기라는 제목의 책이 발행되면 좋겠다. (물론 그 인기도서의 내용을 전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미워하는 사람이 생겼다 하면 다들 눈코입 가리고 그런 마음가짐 자체가 나쁘다 비난을 먼저 하니까. 실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미워하는 이가 생긴 당사자는 상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와 심장이 동시에 아리기에 한참 동안 마음이 편할 수가 없는데 말이다.
이십 대 초반의 사회 초년생은 상대의 냉담한 가시에 깊게도 찔렸나 보다. 내 미움을 받던 이로 인해 나는 숨기지도 못할 만큼 우울을 갖게 됐고 꽤 오랫동안 사람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메시지나 메일을 받으면 발송자가 누구인지 확인도 못하고 지독한 평가의 내용일까 알람이 울리면 손을 달달 떨었다. 전과 비슷한 내용이 오면 동이 틀 때까지 혼자 자책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고 이런 증세가 다음날에는 더 심해졌다. 타국에서 만난 동지를 반가워하는 나와 달리 상대는 나를 깎아내리기에 바빠 보였다. 가장 큰 트라우마는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해도 욕먹는구나, 나는 무엇을 해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극심한 자기 비하였다. 생전 의심치 않던 본인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 고민을 하고 병적으로 상대의 눈치를 보며 하나의 행동, 하나의 말투, 하나의 눈빛, 주변의 하나하나에 집착했다.
결국 부족한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미움보다 더 컸던 즐거웠던 순간을 뒤로했다. 미워하는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끼고 애정 하던 그 외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렸다. 당시 옆에서 오래 지켜보던 K는 그런 행위를 가스 라이팅이라 부른다 말했다. 사과를 받고 그를 용서한다 해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고 부정적인 성격 변화는 그렇게 쉽게 극복되지 않을 거라고. K의 말이 주문인 듯 한동안 함부로 마음을 주지도 않았고 아무도 찾지 못할 동굴 속에 들어갔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정말 다행이게도 얼마 안 가 좋은 주변을 만나 자존감은 조금씩 회복되는 듯싶었고 전보다 미워하던 이의 말을 문득 떠올리며 자기 비하하는 시간도 현저하게 줄었다.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그래 이게 정상적인 관계지, 내가 잘못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힘껏 노력한 상황에서 받는 비난은 가스 라이팅이 맞았구나 깨닫게 됐다.
용서의 사전적 의미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주는 것을 말한다. 상대의 연락 전에 나는 이미 그를 잊었다고 이렇게 한마디 하지 못하고 혼자 용서했다 여겼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다 잘하고 잘난 사람이라 본인을 위로하며 상대의 비난에 타격받지 않을 사람이 되자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뜬금없이 들려오는 상대의 소식은 구역질을 불러일으켰다. 상대가 나에게 보여준 교양 없는 행동은 이미 흐릿해져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기가 죽어 자존감이 바닥까지 하락한 내가, 그 바뀌던 계절이 생각나 괴로웠다.
- 사실 완전히 잊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긍정과 평온의 경지로 가기 위해 최대 노력을 하면서 많이 극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는 나를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상대에 대한 일말의 미움이 남아있었다. 기록을 하는 습관 덕에 잊고 싶어도 똑똑한 클라우드 안에 꼭꼭 담겨있다. 이 글을 쓰려 굳이 안 봐도 될 지난 일기까지 씹다 보니 다시 마음 찌릿하다. 관용을 베푸는 것은 전혀 순조롭지 않다. 미움받은 이는 일절 관심도 없을 테고 본인 혼자 미완료일 감정싸움을 해야 하니까
아, 여전히 그를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구나. 아니 예상치 못한 일방적인 사과에 준비가 안된 본인은 용서하겠다는 답보다 에둘러 순간을 피하고 싶어 했다. 사라져 가는 기억 속 억지로 좋은 추억만을 꺼내며 급하게 채팅창을 껐다. 그래, 사과를 받았다고 해서 지독한 트라우마가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니지
이 글의 목적은 명확하다. 미움은 사그라드나 용서는 한순간에 이뤄질 수 없으니 타인을 미워할 용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자. 아무도 모른다. 내가 얼마만큼 밤새 울었고 상대를 미워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