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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20. 2019

아빠의 빚

'82년생 김지영' 76-78쪽

아버지는 결국 명예퇴직을 선택하셨다. 남은 인생은 길고,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고, 자리마다 PC가 놓였지만 수기 세대인 아버지는 여전히 검지로만 자판을 쳤다. 이미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근속 연수를 채웠고, 지금은 퇴직금도 많이 받을 수 있으니 더 늦기 전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중략)

아버지는 그렇게 중국 사업을 포기하셨고, 장사를 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투자 목적으로 전세를 끼고 사 두었던 아파트를 제법 이익을 남겨 팔고 아버지의 퇴직금을 더해 신축 주상 복합 빌딩 1층의 한 미분양 상가를 매입했다.
(중략)
첫 번째 장사는 찜닭이었다. 프랜차이즈 찜닭이 대유행을 했고, 아버지의 가게도 처음에는 줄 서서 먹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그러나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손해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익을 남기지도 못한 채 첫 장사를 접고, 다음으로 치킨집을 시작했다. 말이 치킨집이지 술집이었다. 나인 투 식스 근무 리듬에 맞춰진 아버지의 몸은 밤샘 업무로 급속히 노쇠해 갔다. 이번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급히 장사를 접었다. 그리고 프랜차이즈 빵집을 시작했는데, 곧 비슷한 빵집이 주변에 마구 들어섰고, 심지어 길 건너에 아버지가 하는 가게와 같은 프랜차이즈 매장도 생겨났다. 다 비슷비슷하게 장사가 안 되다가 한두 곳씩 간판을 내리기 시작했다. 임대료 부담이 없는 아버지는 그래도 좀 버틴 편이었는데, 근처에 대규모 카페 겸 베이커리가 들어오면서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82년생 김지영' 76-78쪽)


김동진씨의 생각에도 김동진씨를 시켜서 아빠에게 생활비 독촉을 하게 한 것은 좀 심했다 싶었다. 김동진씨든 김욱진씨든 김동진씨의 엄마든 그 누구도 아빠의 사정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았다. 이미 아빠와 싸우기만 하고 아빠를 맹비난하기만 하는 엄마에게 무의식적인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김동진씨도 아빠와 살갑게 아니 그냥 이야기조차도 거의 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김동진씨의 아빠는 무뚝뚝하지만 착했다. 아빠가 어쩌다가 고등학교 동창이랑 가락시장에서 일을 하게 된 건지, 그 동창과는 얼마나 친한 건지, 왜 그러다가 슬그머니 그 일을 그만둔 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빠는 또 한동안은 친구가 하는 정보통신회사에 '나간다'고 했다. 어떤 직함을 갖고 돈을 받으며 일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의 아빠가 엄마에게 생활비를 주기 위해 대출을 받아왔었다는 사실을 가족 모두는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아빠는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내서 차를 폐차하고 몸이 회복될 때까지 집에 있어야 했다. 그때쯤인지 그 후부터인지 집에 신용정보회사와 같은 곳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기 시작했다고 엄마에게 들었다. 즉 아빠를 찾으며, 얼마의 빚을 언제까지 갚을 건지 독촉하는 전화였고, 그 전화는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왔다. 엄마는 아빠를 다방면으로 의심했지만, 아빠는 지금까지 생활비로 주었던 돈이 대출받았던 돈이라고 했다. 그러나 집에는 빚을 갚을 돈이 없다고 엄마는 말했고, 빚을 갚지 못한 채 집에 오는 독촉전화들을 받는 것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김동진씨도 김욱진씨도 낮 시간에는 밖에 나가 있었고, 아빠 역시 그랬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거의 미쳐가는 것 같았고, 어느 순간 전화벨이 울려도 받지 않았다. 다만 김동진씨나 김욱진씨와 연락할 일이 있을 경우, 미리 신호를 정해놓고, 두 번 전화벨이 울린 다음에 끊고 또 다시 걸어서 두 번 벨이 울리게 하고, 그런 일을 세 번 반복하면 너희인 줄 알테니 그렇게 전화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집에 그런 일이 있는 와중에 김동진씨는 학부를 졸업했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영어를 좋아했기 때문에 영어교육 부전공을 해볼까 하고 부전공 신청을 하고 1년간 수업을 들었지만, 교사가 될 생각이 없었던 김동진씨는 본인이 좋아했던 영어란 것은 문학이 아니라 어학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딱딱한 사회과학인 교육학에 이미 어느정도 적응했는데, 문학적인 감성이 있어야 하는 영문학 공부는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가 교사가 될 것도 아닌데 뭐, 하면서 결국 부전공은 그만두었다.


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도전적인 일을 시도하거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김동진씨는 지금의 전공인 교육학을 벗어나 다른 전공에 눈을 돌리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다만 교육학도 어느정도 적응이 되어가는데,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행정고시를 치르고 교육부의 공무원이 된다는데, 김동진씨는 입시용 시험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사실 별로 재미도 없는 교육학을 수능공부보다 더 열심히 파고들어 공부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싫었다. 회사에 취직을 할까 생각도 해봤는데, 졸업을 할 때쯤이 가까와오자, 아무래도 너무 공부한 게 없고 아는 게 없어서 더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아빠는 완전히 실직했고 빚만 지고 있었으며, 김동진씨가 벌어오는 과외 아르바이트 수입이 유일한 수입원이었으면서도 엄마는 대학원 진학에 대해 비난하지는 않았다. 다만 김동진씨와 같은 해에 졸업한 김욱진씨 역시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하자 한숨을 쉬기는 했다.



그맘때쯤 김동진씨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항상 두세개, 많을 때는 네개쯤 하고 있었다. 이 동네 저 동네, 여자아이 남자아이, 이 과목 저 과목 가리지 않고 다녔다. 영어에 자신이 있어서 주로 영어를 가르쳤지만, 누가 원하면 수학도 가르쳤다. 특별한 요청이 있어서 주 1회만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통 주 2회 수업이기 때문에, 과외를 많이 할 때는 매일매일, 혹은 심지어 하루에도 두 번씩 과외를 하기도 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인 경우도 있지만 조금 떨어진 집에서 하는 경우도 있어서, 과외하는 학생의 집까지 가는 것이 좀 번거롭기는 했지만, 김동진씨는 대체로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다. 영어를 못하던 고등학생 아이에게 중학교 과정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서 문법을 잘 익히게 한 후 아이의 영어점수가 쑥쑥 올라가는 것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미대 지망생이면서도 공부를 해야 하니까 영어 과외를 받던 착하고 조용한 아이와는 가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을 때는 어머니들에게서 과외비를 받을 때였다. 김동진씨는 모든 돈을 다 엄마에게 가져다주었고, 엄마는 그 돈을 생활비로 쓰고 김동진씨와 김욱진씨에게 용돈을 주었다.


김동진씨가 그렇게 여러 개의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김욱진씨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대학원에서 늦게까지 실험을 하다가 집에 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했었던 것 같다. 김동진씨는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때에, 대기업 입사 지원 공고를 보고 내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자리가 많지 않은, 대기업의 인사/교육 파트의 모집 공고였다. 이미 시작한 대학원을 마치고 싶은 마음이 크긴 했지만,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긴 했다. 모든 결정은 엄마로부터 나와야 하는 게 집안의 룰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단 김동진씨는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화를 내며 '아직 오빠도 취직 안 했는데 니가 먼저 나서서 초치지 말고 가만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김동진씨는 회사에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아빠는 집에 드문드문 들어왔다. 처음에는 하루나 이틀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아예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싸우기를 반복하다 지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마 아빠는 엄마에게 지쳐서 집을 나갔을 거고, 엄마는 아빠에게 지쳐서 싸움조차 걸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 안 들어오는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물어도 아빠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김동진씨는 마음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나 하나 건사하고 살기도 바빴다. 김동진씨 역시 점점 포악해져가는 엄마 밑에서 생존하고, 자신의 일을 어떻게든 해내느라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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